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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좋아요 감사합니다!!
추천 좋아요 감사합니다!!23.05.18

문화통치 당시 일본인들의 모습

일제 식민 통치 중에 문화통치 였을 때 조선태형령과 제복,칼착용은 어떻게됐는지 알려주세요.. 사라지게 되었는지 아니면 남아있는데 약화 되었는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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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20년대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 시책을 말한다. 문화 통치(文化統治)는 일본 제국이 3.1 운동 이후 무단 통치의 한계를 느끼고 조선인들의 불만을 누그러 뜨리고자 실시한 식민지 통치 정책이다. 조선인 언론과 집회를 허가하고 무단통치의 상징과도 같았던 헌병경찰제가 보통경찰제로 개편된다.

    유화정책의 효과로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친일파가 많이 나온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이광수를 비롯한 수많은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이 소극적 또는 적극적 친일파로 변절한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민족주의 계열에서 문화통치를 부른 표현인 '민족분열통치'가 문화통치의 본질을 요약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요즘 일선 학교 한국사 수업시간에는 민족분열통치 내지 기만적 문화통치 혹은 이른바 '허울뿐인 문화통치'로 부르는 사례도 늘고 있다.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 제국은 조선인들의 대대적인 반발을 의식하여 '무단 통치'라는 강경한 탄압 정책을 펼친다. 조선총독부의 주도 하에 총독부 기관지를 제외한 모든 언론들이 폐간됐으며 집회 역시 금지됐다. 또한 육군 헌병을 경찰로 동원하여 치안을 유지하였으며 태형과 같은 전근대적인 처벌제도를 도입하면서 한국인들의 저항 역량을 약화시키는데 모든 힘을 기울인다.[1]

    하지만 이런 일제의 강경책으로 쌓여있던 조선인들의 저항심리는 1919년 3.1 운동으로 대폭발을 일으켰고, 일본은 더 이상 무력에만 의지해서만은 조선을 통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는 3.1 운동 외에도 그 여파로 벌어진 제암리 학살사건과 같은 유혈 진압 때문에 당시 일제가 국제사회의 시선을 의식하는 중이기고 했고, 식민지 조선 뿐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도 온건한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진행되던 무렵이라 강경파들의 입지가 좁아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측면도 있었다.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 군, 귀족, 관료 등 그 어떤 연줄도 없고 귀족 작위도 거부한 언론인 출신의 '평민 재상' 하라 다카시 총리가 문민 내각을 수립하여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도 문민 정치를 이행하려 했다. 이렇게 한반도의 강경한 독립운동과 일본 내지의 온전한 문민 내각, 다이쇼 데모크라시 등의 상황이 맞아떨어져 신임 조선 총독에 육군이 아닌 해군 출신 사이토 마코토 대장을 보냈고, 하라 내각은 식민지에도 문화 통치를 시작했다. 당시 해군은 육군보다 조금 더 온건했기 때문에 비록 문민 총독은 아니더라도 강경파 육군을 견제할 수는 있었다. 사이토 총독이 군복 대신 양복을 입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출처: 나무위키 문화 통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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