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사건은 언제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 있어서 북한침투작전을 하기 위해 비밀리에 창설했던 실미도 부대가 벌였던 실미도 사건은 언제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실미도는 인천 용유역에서 무의도가기전 섬입니다
작은섬이고 북파 부대원들의 사건이며 북한과 관계가 좋아질 즈음 더이상 부대가 필요 없어 부대원들을 없에라는 정보가 새어나가 공작원들이 벌인 사건으로 남북의 분단의 아픔을 보여주는 사건 입니다. 살아남은 부대원들은 국가의 보호받지 못하고 묵비권을 행사하는 바람에 모두 사형 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신조 사건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김일성 살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부대가 바로 684 부대 인데요. 이들은 남북 관계가 점점 좋아지자 결국 존재 가치가 없어집니다.실미도 사건 (實尾島事件)은 1971년 8월 23일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무의리 실미도에서 훈련을 받던 공군 북파 공작 684부대의 부대원들이 교관 및 감시병 18명을 살해하고 섬을 빠져나와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진입한 뒤 군 (軍)과 총격전을 벌이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 (현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본사 앞에서 수류탄으로 자폭 했지요. 안타까운 역사적인 사건 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실미도 사건
- 1971년 8월 23일 북한침투작전을 위해 창설된 실미도 부대에서 공작원 24명이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의 탈출, 서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 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실미도 사건은 1971년 8월 23일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실미도에 위치한 대한민국 공군 684부대 북파공작원들이 부대원을 살해하고 부대를 이탈하여 시외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를 향해 돌진하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본사 앞에서 자폭한 사건으로 당시 8.23 난동사건이라고 하였습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 사건으로 알려진 1.21사태가 일어나데 북한이 무장 게릴라를 보내 당시 국가원수였던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여 한 것에 분노하여 그 복수를 계획합니다. 이를 위해 3군에 1개씩 이를 전담할 특수부대를 창설하였는데 그 중 공군 산하에 684부대가 창설되어 실미도에 비밀훈련기지를 마련했습니다.
당시 인원은 31명이었는데 1968년 7월 훈련 중 사고로 1명 사망, 2명이 탈영을 시도하다 처형되었고 1970년 11월 3명이 탈영하여 무의도로 건너가 무의초등학교 숙직실에서 민간인 여성2명을 강간하고 학생 9명과 교사 1명까지 12명을 인질로 잡고 대치하다 자결하였고, 조장이 기간병을 폭행하여 조사과정에서 이 자가 동료 훈련병들을 상습적으로 강간한 사실이 밝혀지며 처형당하여 24명만 남게 됩니다.
1970년 초 국제적인 데탕트 분위기에 남북 적십자회담으로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중앙정보부장이 교체되는 등의 상황으로 암살계획은 뒷전이 되고, 부대 예산 착복에 의해 이들에 대한 대우가 나빠집니다.
봉급이 끊기거나, 음식이 부실해지고, 자원한 소대장 김방일 공군 중사 1명 외에는 특수전 출신 교관 및 조교들이 대부분 떠나는 등의 상황이 되자 그들은 불안해졌고 , 이러한 불만으로 박정희를 만나 담판을 짓고자 부대원들이 기간병들을 죽이고 탈영합니다.
대한민국 육군 제33보당사단예하 해안 경계 부대의 저지선을 뚫고 인천과 수원 간을 운행하던 현대 R192 시외버스를 탈취하여 경인국도를 타고 부평, 소사, 영등포를 거쳐 청와대로 갈 것을 시도하는데 당시 동승했던 버스운전사의 증언에 의하면 실미도 부대원들은 정부에서 자신들을 섬에다 가두고 죽이려했다며 이 모든일의 원흉인 박정희를 죽이겠다고 했답니다.
이들은 무장공비로 간주되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의 유한양행 본사 건물 앞에서 당시 서울 지역 향토 사단인 육둔 제30보명사단예하 병력 등 육군, 경찰 부대에 포위되었습니다.
여기서 684부대원들과 진압군은 총격전을 벌였는데, 684부대원들이 불리해지고 포위망을 돌파할 가능성이 없자 수류탄으로 자폭하지만 4명은 큰 부상을 입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부대원 4명이 국회진상조사에서 증인으로 출석하고 야당의원들은 실미도에 왜 들어갔느냐, 거기서 뭘했느냐 질문했지만 묵비권을 행사합니다.
이유는 진상조사를 앞두고 군 관계자가 찾아와 이대로 가면 사형이다, 마지막 기회다, 월남을 하자, 대신 누가 묻더라도 보안상 절대 말할수없다고 해라, 그래야 모두 살수 있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애초부터 지킬 생각이 없던 약속이었고, 72년 1월11일 군법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70일 후 72년 3월20일 오류동 공군 2325전대에서 총살되었으며 장례없이 암매장되어 아직도 유해의 행방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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