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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천사1004
Jy천사100423.04.03

영국의 장미전쟁은 왜 일어났는지?

안녕하세요 백년전쟁은 프랑스 영국간의 전쟁이었고 장미전쟁은 영국의 내란이라 하던데요 장미전쟁은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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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프랑스는 헨리 5세와의 전투였던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부분의 종친 및 대귀족들이 사망하자 샤를 7세 때부터 쉽게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으나 잉글랜드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백년 전쟁 후 영토가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친 및 대귀족들은 거의 살아 있었기에 이들은 서로의 영토를 둘러싸고 부딪칠 수밖에 없었으며, 왕권에 대한 다툼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백년 전쟁 후 돌아온 병사들 중 농토로 복귀하지 못한 자들은 무리를 지어 종친과 대귀족의 수족 역할이나 사병으로 전락했다. 이것이 잉글랜드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겪어야 할 마지막 과제였다.

    물론 이러한 과제는 종친 귀족들이나 대귀족들에게 국한된 것이지 일반 국민들과는 무관한 것이었고, 이들 왕실 귀족들도 자신의 권력을 전쟁 후 국민의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국민들과 엄정한 중립을 지켜야 할 형편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잉글랜드 왕이던 헨리 6세가 1440년에 이튼 칼리지(Eton College)의 설립과 케임브리지 대학 내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의 웅장한 예배당을 건립하다가 파산했고, 1453년경에는 그의 외조부인 프랑스의 샤를 6세의 혈통 때문인지 정신 이상의 증세마저 보이게 되었다.

    이때 헨리 6세의 조카벌인 요크 공이 워릭(Warwick : 국왕 제조자란 별명을 가진 자)의 지지하에 헨리 6세를 감금하고 요크가의 19세된 젊은 에드워드 4세(1461~1483년)로 등극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4세 집안은 에드워드 3세의 다른 아들의 줄기로서 흰 장미 문장을 쓰는 가문이었고, 앞서 감금된 헨리 6세도 에드워드 3세의 아들로 붉은 장미 문장을 쓰는 랭커스터 가문의 자손이었다. 이로써 두 장미 문장을 쓰는 왕실 집안의 추종자들과 이들을 따르는 사병들 간의 싸움이 시작되었기에 이를 '장미 전쟁'이라 부르게 되었다.

    출처 : 영국사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미전쟁은 15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내전으로 그들은 Plantagenet왕가의 두 분파, 붉은 장미로 상징되는 랭커스터 가문과 흰 장미로 상징되는 요크 가문 사이에서 싸웠습니다.

    장미전쟁의 근본 원인은 영국 통치권을 놓고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에 오랫동안 지속된 갈등이 있었고 이 갈등은 여러 요인에 의해 촉발되었습니다.

    약한지도력으로 영국 황 헨리 6세의 약하고 비효율적인 통치는 장미 전쟁 발발에 기여했습니다.

    헨리는 강력하고 단호한 지도력을 제공할수 없었고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할수 없어 경쟁 파벌로 채워진 권력 공백이 생겼습니다.

    왕조분쟁으로는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가문은 둘 다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었고 두 가문 모두 영국을 통치할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이 왕조분쟁은 장미 전쟁 발발의 주요 요인이었습니다.

    또 장미전쟁은 영국에서 상당한 경제적, 사회적 변화의 시기에 발생했고 서로 다른 사회 계층과 경제집단 간의 긴장이 갈등에 기여했으며 왕족과 귀족 내부의 라이벌 파벌은 정치적 책략과 동맹을 통해 분쟁에서 우위를 차지했으며 이는 장미 전쟁 발발에 기여했습니다.

    요약하면 장미전쟁은 15세기 후반 영국에서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에 벌어진 내전으로 영국을 통치할 권리에 대한 오랜 논쟁이었으며 약한 지도력, 왕조 분쟁, 경제적 사회적 긴장, 정치적 책략이 원인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차재우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1. 장미전쟁이란?

    영국 귀족들이 1455~1485에 걸쳐서 치른 왕위 쟁탈전인데 랭커스터가의 붉은 장미 문장과 요크가의 흰 장미 문장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2. 장미전쟁이 일어난 원인은?

    백년전쟁이 1453년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면서 영국은 더 이상 프랑스에서 살지 못하고 섬으로 쫓겨나는데 이때 영국의 왕이 헨리 6세였는데 영지를 잃은 것뿐만 아니라 정신병도 생겨서 국가의 운명이 어려웠습니다. 이 틈을 타서 권력을 잡으려 했던 왕의 친척이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와 제2대 서미싯 공작 에드문드 뷰포트였습니다. 헨리 6세의 할아버지인 헨리 4세는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인데 왕가가 아니었으나 백년전쟁 때 플랜테저넷 왕가의 리처드 2세의 왕좌를 빼앗아 왕이 된 인물입니다. 그래서 헨리 4세~헨리 6게까지의 왕들은 모두 랭커스터 왕가가 됩니다. 그리고 헨리 4세에게는 서머싯 백작 존 보퍼트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이 동생의 아들인 서머싯 공작 에드워드 보퍼트가 랭커스터파를 형성합니다.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동생이 있었는데 요크 공작 에드문드 랭글리이고 그의 손자인 요크 공작 리처드 인에 이들이 요크파를 형성합니다.

    요크 공작 리처드가 헨리 6세에게 국가 재건을 위한 의회 소집을 요청하고 이 의회에서 요크 공작 리처드와 서머싯 공작 보퍼트가 서로 싸우면서 라이벌 관계가 만들어지고 둘 모두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후손이어서 요크 공작 리처드보다는 서로 가까웠고 당시의 실권자였던 왕 헨리 6세의 아내였던 마가렛도 서머싯 공작 진영을 지원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신병이 있던 헨리 6세를 대신해서 최초의 호국경이 된 사람은 요크 공작이었고 이후 헨리 5세의 병이 양호해지고 나서야 서머싯 공작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이렇게 두 공작이 서로 싸우면서 권력 쟁탈을 하는 동안 잉글랜드는 서서히 나라 전체가 요크파와 랭커스터파로 나뉘고 죽고 죽이는 내전에 휩싸이게 됩니다. 백년전쟁에서 패한 에드워드 3세의 후손들이 불안정한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친척들을 죽인 전쟁입니다.


  •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은 영국에서 1455년부터 1485년까지 30년 동안 왕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치열한 내전입니다.

    당시 영국에는 막강한 가문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에드워드 3세의 손자 랭커스터와 요크를 각각 지지하는 귀족들 간에 내전이 시작됐습니다. 요크가의 문장(紋章)은 흰 장미, 랭커스터 가문의 문장은 빨간 장미였기 때문에 역사가들이 장미전쟁이라 불렀습니다.

    결국 요크 가문의 승리로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는 단명하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5세가 어리다는 점을 이용해 리차드가 에드워드 5세를 가두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튜더 가문의 헨리에게 패하자 튜더 왕조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헨리 튜더는 전쟁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요크 가문의 딸 엘리자베스를 왕후로 맞아들였으며 붉은 장미와 흰 장미를 합쳐 왕가의 새로운 문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장미는 영국의 국화(國花)로 지정되었으며 지금도 붉은 장미와 흰 장미를 합친 표시는 화합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