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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빙
비비빙23.06.21

옛날 결혼식때 연지곤지는 왜 찍었나요?

옛날 결혼식때 보면 신부 얼굴에 연지곤지를 찍은이유가 있었을까요? 언제부터 그렇게 하기 시작했는지 결혼역사에 대해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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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지곤지 화장은 우리나라 전통혼례 방식의 하나이며, 중국 은나라 주왕 때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에 늦도록 장가를 가지 못한 총각이 있습니다. 길을 가던 총각은 우연히 남녀 배필을 묶어주는 할머니를 만난다. 할머니에게 자기 배필을 물어보자, 코흘리개 갓난아이라고 한다. 어느 세월에 갓난아이를 키워 처로 삼을까 싶어서 돌멩이로 이마를 때리고 도망친다. 총각이 나중에 그 고을의 원님으로 부임합니다. 이방에게 중신을 서라고 했더니 한 처녀를 데려옵니다. 총각이 신부에게 이마와 볼에 붉은 점을 찍은 이유를 묻습니다. 신부는 어렸을 때의 일을 이야기하며, 이마에 있는 움푹한 자국이 보기 싫어 이마와 볼에 연지를 찍었다는 것입니다. 이후부터 전통 혼례에서 연지곤지를 찍게 되었다고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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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지는 볼과 입술을 붉은 색조로 치장하는 화장품입니다. 홍화나 주사로 만들었습니다.

    연지를 사용하여 이마에 동그랗게 칠하는 것을 곤지라고 하며, '연지곤지'로 같이 묶어서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샤머니즘 문화권에서 잡귀가 붉은색을 싫어하여 피한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시초는 중국 은나라 주왕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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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지곤지를 찍는 이유는 혼례를 치르는 경사스러운 날 나쁜 잡귀들이 신부 주변에 꼬이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 입니다.

    이마에 동그랗게 치레하는 것을 곤지하고 하는데 이 역시 연지를 사용하며 연지화장의 최초 기록은 서기전 1150년 중국 은나라의 주왕때, 약 3000년의 역사를 가지고있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언제부터 연지를 치레에 이용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신라의 여인들이 연지화장을 하였다고 합니다.

    5,6세기 경 축조되었을것이라 추정하는 수산리 소재의 고구려 벽화 인물상에도 볼과 입술이 발려져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1500~2000년 쯤부터 사용된 것이라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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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마에 동그랗게 치레하는 것을 곤지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연지를 사용한다. 연지화장의 최초기록은 서기전 1150년경 중국 은(殷)나라의 주왕(紂王) 때이니까 약 3,000년의 역사를 지닌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언제부터 연지를 치레에 이용하였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신라의 여인들이 연지화장을 하였다고 한다.


    5, 6세기경에 축조되었으리라는 수산리 소재의 고구려 벽화 인물상에도 볼과 입술이 발라져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도 1,500∼2,000년 전쯤부터 사용된 것이 확실하다. 연지 화장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샤머니즘 문화권에서는 주색축귀(朱色逐鬼) 속신(俗信)을 신봉한바, 주색금기(朱色禁忌)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가장 보편화되어 있다.


    이밖에 중국에서 후궁들이 생리중일 때 임금을 모시지 못한다는 표시로 뺨에 연지를 발랐다는 설이 있다. 또 중국 오(吳)나라의 손화(孫和)라는 사람의 부인이 뺨의 상처를 치료하느라고 흰 수달피 분말에 옥가루와 호박가루를 섞어 바른바, 붉은 흉터가 아름다워 보인 까닭에 치장인 줄 착각하여 부인들이 모방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 원시시대의 남자들이 날짐승을 잡은 용맹을 과시하기 위하여 입가에 묻은 피를 닦지 않고 다닌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다. 한편, 우리 나라 여인들의 연지 화장유래에 대하여 이익(李瀷)과 이규경(李圭景)은 흉노(匈奴)의 고유습속이 중국에 전래되고, 다시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다고 하였다. 최남선(崔南善)은 ≪고사통 故事通≫에서 몽고족의 습속이 고려시대에 전래되었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국가이므로 3,000여 년 전쯤 우리 나라를 포함한 동이족에게 보편화된 고유 치장수단이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고구려 벽화의 인물상이 연지화장을 하고 있으며, 고구려의 악공(樂工)이 이마에 연지를 발랐다.


    또 신라의 여인들이 연지화장한 사실에 미루어볼 때, 원(元)나라에서 고려에 전래되었다는 최남선의 주장도 틀린 것이다. 단오에 비녀 끝에 연지를 발라 재액을 물리치고, 일부 산간지방에서 전염병이 돌 때에 예방수단으로 이마에 연지를 칠하거나 붉은 색종이를 오려 붙이는 관습이 있었다. 농촌에서 밭일하기 전에 발톱에 봉숭아 꽃물을 입혀 무사하기를 기대한 관습이 있다.


    이를 근거 삼아 주색금기 때문에 볼과 입술에 연지를 발랐다는 설이 강한 설득력을 지녀왔다. 그러나 신부가 연지화장을 하되, 재혼하는 경우 볼과 이마에 연지를 바르지 않는 것을 보면 주색금기와 관련지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젊음의 상징행위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여성이 가장 젊음이 충만할 때인 14, 15세에 이르면 누구든지 저절로 뺨이 홍조를 띤다고 한다.


    또 힘이 왕성한 남자, 다시 말해 영웅은 입술이 붉다 못해 검붉다고 표현해왔다. 그러므로 연지화장은 젊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며, 처녀·신부의 연지·곤지는 숫처녀임을 과시하는 수단이라고 추측된다. 연지를 만드는 재료는 잇꽃과 주사(朱砂)이다. 신라에서는 잇꽃으로 연지를 만들고, 고구려에서는 주사로 만들었다.


    주사로 만든 연지는 단지(丹脂)라고도 부르는데, 잇꽃연지에 비하여 색깔이 선명한 장점이 있으나 장기간 사용할 경우 부작용, 즉 단독(丹毒)이 우려되었다. 잇꽃은 주사연지보다 사용하기 불편한 단점이 있다. 잇꽃의 꽃잎을 여러 차례 찧어 홍색소를 분리시켜 만드는데, 환약처럼 만들어두었다가 기름에 개어 발랐다.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주사로 연지를 만들던 방법은 다음과 같다. 날계란 두 개를 구멍을 내어 흰자를 모두 빼낸 다음, 노란자위 두개를 한 껍데기 속에 넣고 휘저어 융합이 되면 주사 2돈, 명반 2돈을 뭉글게 갈아 사향을 조금 넣어 한꺼번에 완전히 섞은 다음 그것을 계란 껍데기 속에 넣고 다시 열 번 가량 휘젓는다.


    계란 껍데기를 절반으로 잘라 약이 든 계란의 위를 덮고 솜으로 싸서 단단히 맨 다음, 생초 주머니에 넣어서 제즙을 안친 솥 안의 공중에 매달고 반나절을 끓이다가 꺼내어 식히고 껍데기를 버린 뒤, 다시 빻으면 새빨간 색소가 된다. 이는 뺨에 잘 발라지고 붉은 색이 선명하며, 윤이 났다고 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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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방정색이라고도 하며, 황(黃), 청(靑), 백(白), 적(赤), 흑(黑)의 5가지 색을 말한다.

    음과 양의 기운이 생겨나 하늘과 땅이 되고 다시 음양의 두 기운이 목(木)ㆍ화(火)ㆍ토(土)ㆍ금(金)ㆍ수(水)의 오행을 생성하였다는 음양오행사상을 기초로 한다.

    오행에는 오색이 따르고 방위가 따르는데,
    중앙과 사방을 기본으로 삼아 황(黃)은 중앙,

    청(靑)은 동, 백(白)은 서, 적(赤)은 남, 흑(黑)은 북을 뜻한다.

    적(赤)은 오행 가운데 화(火)에 해당하며 생성과 창조, 정열과 애정,

    적극성을 뜻하여 가장 강한 벽사의 빛깔로 쓰였다.

    이처럼 음양오행사상에 기반하여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음귀를 몰아내기 위해 혼례 때 신부가 연지곤지를 바르는 것,

    나쁜 기운을 막고 무병장수를 기원해 돌이나 명절에 어린아이에게 색동저고리를 입히는 것,

    간장 항아리에 붉은 고추를 끼워 금줄을 두르는 것,

    잔치상의 국수에 올리는 오색 고명,

    붉은 빛이 나는 황토로 집을 짓거나 신년에 붉은 부적을 그려 붙이는 것,

    궁궐ㆍ사찰 등의 단청, 고구려의 고분벽화나 조각보 등의 공예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연지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옛날은(殷)나라 주 왕(紂王)의 왕비였던 요염하고 음탕하며 독 부로 유명한 달기가 연(燕)나라에서 가져다가 만들었기 때문에 "연지"라 했다 하며 진한 화장은 달기를 연상하여 천박하게 대접했다고 전한다.

    옛날 중궁의 한나라 때는 천자제후의 궁녀(宮女)들의 월경이 있을 때는 잇 꽃에서 만들어진 붉은 연지를 얼굴에 묻혀서 월경 중 임을 표시했다 하며 나중에는 월경의 유무에 상관없이 화장용으로 연지를 볼, 입술, 손톱 등에 칠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는 결혼식 때 새색시의 얼굴에 연지 곤지를 찍는 풍습이 있는데 이것은 붉은 색이 악귀를 물리친다는 주술적인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화장 술의 하나로서 결혼식의 신성함을 지키기 위해서 이다.

    우리나라 연지 화장은 신라 때부터 시작했다. 즉 연지는 신라인의 발명품인 셈이다.

    연지곤지 찍기는 색깔도 너무 선명하고 모양도 두드러진다. 그렇다면 왜 이런 화장을 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TV에서 방송되는 사극을 통해 전통 결혼식 장면에서 신부가 연지곤지를 찍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장면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옛 풍속에서 재혼하는 여성은 볼과 이마에 연지를 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지곤지 화장의 유래는 초혼과 재혼의 차이에서 찾는 것이 더 옳을 듯 싶다. 그렇다면 연지곤지 화장은 숫처녀임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나이 어린 처녀들은 화장을 전혀 하지 않아도 뺨에 붉은기가 돈다. 조금만 부끄러워도 뺨이 발그레해진다, 그러므로 발그레한 뺨은 젊음, 싱싱함, 처녀성의 상징이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뺨과 이마에 연지를 발랐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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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지곤지는 전통 혼례에서 신부의 화장법을 말합니다. 볼과 이마에 붉은 점을 찍어 신부 주변에 악귀가 오지 못하도록 막은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자료에 따르면 다음의 내용이 존재합니다

    이마에 동그랗게 치레하는 것을 곤지라고 하는데, 이때 연지를 사용한다. 연지 화장의 최초 기록은 B.C. 1150년경 중국 은殷나라의 주왕紂王 때이므로 약 3000년의 역사를 지닌다. 우리나라 사람이 언제부터 연지를 썼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신라의 여인들이 연지 화장을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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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결혼식때 신부의 볼과 이마에 바르는

    붉은색의 연지곤지는 붉은색을

    싫어하는 귀신이 들지않게 하기위해

    발랐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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