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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쓴 반달곰
안경 쓴 반달곰23.07.19

목민심서와 자산어보를 쓴 정약용은 어떤 사람인가요?

유배를 당하고 목민심서와 자산어보 등 많은 책을 썼다고 하는 정약용은 어떤 사람이길래 유배를 당했고 또 그렇게 많은 책을 쓴 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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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이다.

    카톨릭에 대한 정부의 박해로 인해 카톨릭 신자인 조카사위의 편지가 발견되어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19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약용은 조선후기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실학자입니다.

    1762년(영조 38)에 태어나 1836년(헌종 2)에 사망했습니다.

    남인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개혁사상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정조 재위기에는 관료로 봉사하면서 과학자로서의 면모도 보였습니다.

    이 시기에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장기간의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유배 중에 당시 사회의 피폐상을 직접 확인하면서 그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을 포괄하는 거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후기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실학자 입니다.

    그는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를 배우며 과거시험을 준비, 16세가 되던 1776년 이익의 학문을 접했습니다.

    이때 부친의 벼슬살이 덕분에 서울에서 살게 되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이가환과 학문의 정도가 상당하던 매부 이승훈이 모두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고 자신도 그 이익의 유서를 공부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데 적지 않은 의미를 주었고, 정약용이 훗날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이 시기에 마련되었습니다.

    1783년 그가 진사시에 합격한 후 부터 1801년 발생한 신유교난으로 체포되던때로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서울의 성균관 등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하며 대학, 중용 등의 경전 연구, 1789년 식년문과 갑과에 급제해 희릉직장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됩니다.

    후 10년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홍문관수찬, 경기암행어사, 사간원사간, 동부승지, 화부승지, 곡산부사, 병조참지, 부호군, 형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 1789년 한강에 배다리를 준공, 1793년 수원성 설계 등 기술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 시기 그는 이벽, 이승훈 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지만 천주교 신자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정약용은 천주교를 서학으로 인식하고 학문적 관심을 가졌을 뿐 그의 다른 형제들과 달리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습니다.

    정약용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자신의 정치적 진로에 장애가 되었는데 당시 천주교 신앙은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집권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고있었고 그의 천주교 신앙 여부가 공식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1791년이며 그는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시달림을 당해야 했고 이 때마다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함을 변호, 그러나 그는 1801년 천주교 교난 때 유배당함으로 중앙의 정계와 결별하게 됩니다.

    그는 교난이 발발한 직후 경상도 포항 부근에 있는 장기로 유배, 곧 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 그는 이 강진 유배기간동안 학문 연구에 매진, 이를 자신의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킬수있는 기회로 활용합니다.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강학과 연구, 저술에만 전념하여 이 기간동안 중국 진나라 이전의 선진시대에 발생한 원시 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함으로 이를 기반으로 성리학적 사상체계를 극복해보고자 했습니다.

    그는 조선왕조의 사회현실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 그의 개혁안은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의 일표이서를 통해 제시되고있고 이들 저서는 유학의 경전인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와 사회개혁안을 정리한 것으로 주목받으며,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해 경집에 해당하는 것이 232권, 문집이 260여권에 이르며 대부분 유배기에 쓰였습니다.

    1818년 57세 되던 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생을 마감하는 1836년 까지의 기간으로 그는 이 시기에 향리에 은거하며 상서 등을 연구, 강진에서 마치지 못한 저술작업을 추진, 매씨서평의 개정, 증보작업이나 아언각비, 사대고례산보 등이 이때 만들어졌고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자서전적 기록인 자찬묘지명을 저술, 조선학 운동의 목적에서 외현손 김성진이 편집하고 정인보, 안재홍이 교열에 참가하여 1934~1938년 신조선사에 간행한 154권 76책의여유당전서 도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다산정약용은

    유배과정에서 불교와 접촉했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다시 서학에 접근했다는 기록도 이와 같은 부단한 탐구정신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인다. 그는 학문 연구와 당시 사회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던 조선 후기 사회의 대표적 지성인 이었다는 답변을 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