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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6.11

독일 히틀러는 어떤 방식으로 오스트리아를 합병 하였나요

독일 나치 히틀러는 정권을 잡은 뒤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직전에 오스트리아를 합병 하는데요 어떻게 이렇게 쉽게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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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38년에 이르러 히틀러는 자신의 산장으로 2월 12일 슈슈니크를 초빙하여 오스트리아를 독일의 보호국으로 두기 위한 여러 조치를 요구했다. 슈슈니크가 도저히 못 수용할 제안이었지만, 오스트리아 나치를 대표하는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Arthur Seyss-Inquart)를 내무장관으로 임명하는 데는 동의했다.[12] 그리고 이 시점에 이르러서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완전히 독일에 합병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저 독일의 외교를 적극 지지할 나라를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고, 무솔리니가 1934년처럼 나올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이만한 합의라도 히틀러에게는 만족스러웠으며, 오스트리아 나치당에게 보낸 공개적인 지시에서도 "슈슈니크와의 합의는 매우 광범위한 것이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간에는 어떠한 마찰도 해소되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허나, 위의 생각과는 달리 아래인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말단들은 독일과의 통합이 다가왔다 여기고 과격한 폭력 활동에 돌입했다. 국내의 치안 불안에 말려든 슈슈니크는 국민투표를 제안하여 독일과의 합의를 무시하며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확립하려고 시도했다. 이 국민투표 제안이 히틀러의 역린을 건드렸다.


    이것을 안 히틀러는 격노해 "이건 사기투표이니 독일은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국민투표의 중지와 자이스잉크바르트에게 수상직 이양을 요구하는 한편, 3월 10일에 오스트리아 제압 작전을 지시했다. 3월 12일에 독일 국방군을 월경시켜 무력으로 오스트리아 국토를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이 정보는 오스트리아에 누설되어 오스트리아 정부에 충격을 주었다. 3월 10일 오후 4시, 슈슈니크는 국민투표의 중지와 총리에서 사퇴할 것임을, 즉 '굴복'의 뜻을 라디오로 방송했다. 슈슈니크는 자이스잉크바르트를 후계로 추천했지만, 오스트리아 대통령인 빌헬름 미크라스는 승인을 꺼렸다. 그러나, '굴복' 방송에 힘이 난 각지의 오스트리아 나치당원은 빈, 린츠, 그라츠, 인스브루크 등의 지방 정부의 시설에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걸었다. 다시 독일은 아직 내무장관이던 자이스잉크바르트에게 "파병 요청"을 강요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오후 9시 45분에 파병 요청을 하였다. 끝내 12일이 되기 조금 전, 미크라스는 마침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수상으로 지명했다.


    독일 육군은 3월 12일에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으나, 그 과정이 근대 육군의 교과서라던 예전의 명성은 못 찾을 어설픈 모습이었다. 히틀러가 조급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와 차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3일 만에 작전안을 짜서 움직여야 했으며, 보급과 행군 모두 착오의 연속이었다.[13]


    그러나 끝내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무저항으로 오스트리아로 진주했고,[14] 대통령에게 사임을 강요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된 자이스잉크바르트는 3월 13일 빈에서 히틀러와 만나 병합에 관한 법률안에 서명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3월 14일, 히틀러는 자신의 고향인 린츠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1920년대 오스트리아 정계는 기독교 사회당과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라는 2대 정당이 정치했으나, 대공황기에 독일과의 관세동을 통해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기사당 출신 수상인 쇼버의 노력이 독일의 동의 및 독일과의 통일을 향하는 첫걸음으로 인식한 국내의 통일된 지지에도 국제적인 압력으로 포기했고 그리고 "저자세 외교"라고 비판한 사민당과 이를 부당하다고 여긴 기사당과의 알력은 결국 독일 나치당의 대두를 허락했습니다.

    히틀러의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전역을 접수한 가운데, 형식적인 법 절차로 나치당 감독 아래 4월 10일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투표지부터 병합 찬성에 유리하게 만들었으며, 어떤 지방에서는 투표소를 경비하는 독일군 앞에서 공개 투표도 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결과는 97% 찬성이기에 결국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합병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