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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친칠라280
대단한친칠라28023.01.16

살바도르 달리의 미술을 초현실주의로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살바도르 달리는 몽환적인 분위기와 시계를 소재로 한 그림으로 유명한 거 같습니다. 살바도르 달리의 미술을 초현실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고 초현실주의 미술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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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살바도르 달리에 대해

    에스파냐의 대표적 초현실파 화가. 피게라스 출생. 살바도르 달리는 1904년 5월 11일 스페인 카탈로니아 북부의 작은 마을 피게라스에서 공증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하얀 암벽이라든가 심연의 바다 등에 경이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1922년 마드리드 미술 학교에 입학한 그는 학교의 수업에는 만족치 않고 인상파, 점묘파를 거쳐, 미래파, 피카소의 큐비즘 등에 관심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이듬해에는 이탈리아의 형이상 회화의 화가 키리코를 알고 나서 몹시 흥분하기도 했는데 그의 초현실적 성향은 그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것이다. 그는 보기 드문 조숙아로 일찍이 인상파나 점묘파·미래파의 특질을 터득하고 입체파나 형이상회화파 등의 감화를 받으며 작풍편력(作風遍歷)을 하였다.



    강한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방법론적 의식적 태도가 농후하며, 젊어서 받은 프로이트의 영향이 일생을 지배했다.그후 1925년 피카소의 신고적주의에 대한 관심을 가져 실험을 거듭했지만 엄격한 기하학에 이내 싫증을 느끼고 만다. 그 밖에도 베르메르, 벨라스케스, 라파엘로에까지 관심을 보여 달리의 고전화에 대한 집착은 평생 그의 생애를 통해 일관되어진다.



    미술 학교 재학 시절 반정부 활동함으로 잠시 감옥에 갇힌 바 있는 그는 차츰 무정부적인 타락된 생활이 심화되어 그로 인해 1926년 퇴학 처분을 받고 귀향케 되었다. 1925년에서 1927년에 걸쳐 마드리드 및 바르셀로나에서 발표된 그림들은 다소 모순된 양식의 그림들이지만 매우 면밀하게 그려져있다. 1927년 그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해가 되었다. 파리로 나온 그는 피카소를 만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그의 그림은 여태까지와는 달리 놀라운 변모를 보인다.


    이 시절 그는 피카소의 영향을 직접 받으면서도 그에 구애되지 않았고 미로와의 접촉을 갖고 초현실주의 화가들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드디어 그는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약을 하기 시작한다. 그 외에도 큐비즘, 미래파, 형이상 회화파 등에서 얻은 영향이 그나름의 독특한 회화로 이르는 바탕이 된다.



    1929년 카다퀘스의 집에는 많은 손님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들 중 러시아 태생 폴 엘뤼아르의 부인 엘레나(갈라)에게서 운명적인 만남을 직감하고 그녀에게 짙은 연민의 정을 느낀다. 파리에서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는 그들을 카다퀘스에 방문토록 초청한 것이다. 두 번째의 만나마에서 달리는 돌발적인 웃음과 이상한 행동 등으로 그녀의 주의를 끌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녀 역시 그러한 그의 열정에 못이겨 그에게 이끌리고 만다. 극도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려던 그는 (그녀야말로 나를 치유해 줄 것이다.)라고 믿었으며 그녀에게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들은 1929년 말 파리에서의 작품전이 열리는 도중, 홀연히 그곳을 잠적, 사랑의 도피 여행을 더나 갚은 사랑에 빠져들었으며, 달리는 그때 요람 속의 기쁨을 재음미하기에 이른다. 한때, 달리는 기억의 근원은 태아 적부터 시작되었음을 암시하는 듯 그 요람의 세계를, (거기는 정말 성스러웠다. 그야말로 천국이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폐쇄된 그 호텔의 방 속에서 갈라와의 생활을 통해 태아의 아늑한 꿈을 만끽한 것이다.



    그들은 곧 카다퀘스로 돌아와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리가크 항에 조그만 방을 구해 새 생활을 시작하였다. 타인의 아내를 가로챈 아들의 부도덕에 노한 아버지는 결국 그에게 절연장을 보내기에 이르렀고 달라는 그 충격으로 삭발하나 채, 먹다 남은 섬게 껍질과 함께 그 깍아버린 머리카락을 흙 속에 묻고 말았다. 그 매장은 곧 그를 낳고 기를 아버지와 가정이었으며 결국 그는 혈연을 잃은 대신 보다 정신적이며 숙명적인 갈라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녀로 친해 참다운 달리로서 성장하게 된 것이다.달리의 수많은 작품 속에는 갈라가 출현케 되고 모든 여성의 모습이 갈라로 변신되었다. 심지어 성모 마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도 갈라의 형상으로 대신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노이로제에서 고통받는 그를 구하고 치유한 것이 갈라였기 때문이다. 아마 수많은 화가들 중 달리만큼 여자의 내조와 영향을 받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또하나 달라의 예술에 큰 영향을 준 것은 그가 성장한 카다퀘스의 해안과 리가트 항이다. 태양이 불타고 바닷물이 섬, 바위들 사이로 넘나드는 곳에서 변덕스로 그의 기분을 억제하였던 것이다. 그의 리가트 하아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불모의 고장이요, 아침은 난폭하고 거친 명랑함을, 저녁은 기분나쁜 비애를 가끔 느끼게 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특이한 환경이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데 그것은 황량한 땅이지만 깊숙히 위치한 마치 자궁 안과 같은 평안함을 주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살바도르 달리는 금세기의 가장 특이하며 괴이한 화가로서 그의 작품 속에는 현대의 작품들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의 회의, 압도하는 무의식의 위력 등이 내재되어 있다. 즉, 그의 작품 속에는 통속적 경험과 상식으로써는 전혀 감지키 어려운 기묘한 것들로써 이루어져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초현실의 세계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한 그들 두고 어떤 비평가들은 병적인 그림, 또는 광인의 그림이라고들 평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과 개성이 무의식적인 내용물의 홍수 속에 빠져들어 잠적하는 현상은 마치 정신 분열의 증세와도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의 그림을 두고 광인의 그림이라고 평할 수 있었던 시기는 이미 지났다.



    달리 자신의 언급처럼 광인과 자신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그가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가 광인이라면 그의 작품에서 어떤 공감을 느끼겠는가? 만일 그것을 느낀다면 "그것 역시 모순이 아니겠는가?"라는 문제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식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때 그의 손이 광인의 손이라 친다면 그의 괴이성을 체외하고라도 극사실적인 기법과 기발한 짜임새의 구성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달리는 철저한 자기 본위의 독특한 화가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현대인이 지닌 갖가지 고민, 불안, 모순, 공포, 절망 등이 숨김없이 표현되고 있다. 1928년 파리로 가서 초현실주의 화가나 시인들과 교유하였다. 이듬해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고, 이때 A.브르통에 의해 정식으로 이 파의 일원으로 인정되었다.



    그 스스로 ‘편집광적·비판적 방법’이라 부른 그의 창작수법은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환각을 객관적·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하나의 대상을 2중 3중으로 다른 이미지로 보는 병적인 착각을 이용했다. 즉 말이 여인의 나체로 보인다거나 하나의 풍경이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거나 하는 중복상을 교묘하게 화면에 표현했다.



    그는 <그림이란 많은 비합리적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천연색 사진이다>라고 정의하고, 이상한 환상을 객관적·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현대는 인간의 내적 상상력을 제어하고 인간의 추억이나 향수, 신앙, 전설, 영웅, 꿈들을 과감히 매도한다. 달리는 그러한 상상력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편집광적 비판 방법을 연마하여 자신만의 자유로운 길을 개척해 나간 것이다.



    그의 의도적인 괴이한 언행과 용모 속에는 비상함과 지속성이 내재되어 있고 그의 주위를 맴돌며 그를 고뇌 속에 빠뜨렸던 수수께끼를 탐구하려는 끊임없는 욕망이 감추어져 있다. 달리의 회화성은 같은 초현실주의자들과 비교할 때 혼란성을 띠고 있으나, 마그리트와 같은 분열성은 보이지 않는다. 또 그가 초자연의 세계를 여실하게 묘사하였고 그 대부분이 그로테스크하며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중세의 화가 보시와 곧잘 비교되며, 달리를 현대의 보시라고 단순화해서 말하는 것에 관해 달리 자신은, (그것은 자기 개성에 관한 가장 나쁜 오해 중의 하나이다. 보시의 괴물은 안개 쌓인 유럽의 숲에 의한 것이며 중세에 대한 심한 소화불의 증세를 나타내고 있다.그러나, 보시의 그림은 형언하기 어려우리만치 세밀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달리의 그림은 두 세가지의 요소만으로도 그의 환상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환상 미술의 전례를 살펴보면 보시라던가 브뤼겔, 블레이크, 르동, 앵소르 등이 있지만 그들에 비해 달리는 보다 처절하고 본능적이며 노출증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다.그에게서는 파라노이아와 페티시즘이 특질로 나타나며, 내부와 외부를 전도시켜 마치 내장을 드러내 보이는 듯한 독특한 사실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이를테면 밤같이 어두운 세계를 밝은 양광 아래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달리가 (비합리성에 도전)하게 된 것은 서구의 각국이 정치적 긴장의 팽배와 대립에 의해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1930년대였다. 즉, 유럽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개혁과 부정, 정치적으로는 혁신과 혁명을, 예술적으로는 재래의 예술 형식을 파괴, 부정하는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무렵이었다. 이러한 양상 아래 전개되는 제 미술 운동에 스페인 태생의 작가들이 많은 활약을 보인다. 이를테면 유기적 환상의 세계를 표줄한 건축가 가우디라든가 20세기의 조형 혁명으로 불리우는 큐비즘의 대표적 화가 피카소라든가 그리스 등이 있으며 초현실주의의 미로, 달리 등이 나타난 것이다.


    달리는 회화의 목적은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내적세계와 외적세계 사이의 육체적 장벽을 동시에 제거하고 , 현실과 비현실 및 명상과 행위를 서로합하여 혼합되어전생명을 지배하는 초현실성을 창조하는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스페인은 유럽 중에서도 거구에 속하지 아니하며 역사적으로 동방 문화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인종이나 정치적인 면으로도 파악키 힘든 복합적 요소를 지닌 나라인 것이다. 달리의 말을 빌면 (프랑스은 가장 지성이 풍부하고 합리적인 나라인데 반해 스페인은 가장 비합리적인 또한 가장 신비스러운 나라)라고 한다. 그러한 환경 요인이 그들을 서양 회화의 위기적 상황에서 두드러지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게 한 것으로 보여진다.



    1937년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로 복귀하려는 욕구가 커졌으며, 초현실주의 화가 모임에서 제명당하면서까지도 원자과학이나 가톨릭의 신비성을 추구하여 왕성한 제작을 하였다. 40년 미국에 귀화하여 왕성한 제작활동을 하였다. 달리는 (천재의 일기(1964))에서 (미치광이인 채하며 피타코라스적 정확성을 가춘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말하고 잇다. 전후의 달리는 겨우 합리와 비합리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하기에 이른다.



    작품으로 《피는 꿀보다 달콤하다(1928)》 《기억의 잔재(1931)》 《불타는 기린(1935)》 《레다 아토미카》 등이 있다. L.브뉴엘과 함께 전위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 《황금시대(1931)》 등의 제작에도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