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에 엄복동이라는 인물이 정말 훌륭한 인물이었나요?
저는 영화만 보고 드는 의문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그는 자전거타기는 잘 했지만 자전거 도둑이기도 했다고 알고 있는데 영화에서는 순박하면서 독립운동에도 기여하는 인물로 그려져서 감독은 역사적 사실을 참고했다고 하기에 진실이 무엇인지 질문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3년 4월의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로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사가 서울 용산 연병장에서 개최한 이 대회는 서울(용산), 인천, 평양의 3곳에서 벌어진 전국 규모의 대회로, 당시로선 경이적인 규모인 10만 명의 관객이 운집했다고 한다. 이때 엄복동은 중고 자전거 끌고 털레털레 나와 우승을 차지하고, 이후 열리는 자전거 대회마다 다 휩쓸은 선수 입니다.
일본의 우민화 정책이 극을 달하던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과 함께 전국적인 애국, 계몽운동, 의병들이 한창 일어나던 시절 우민정책(愚民政策)의 일환으로 당시 조선인들의 기를 꺾고자 잘나가던 엄복동을 밟아주기로 결정한 일본은 1920년 5월 2일 일본의 고수 모리 다카히로까지 초청해서 경성시민대운동회의 자전거 경기를 열게 된다. 그러나 엄복동이 모리 다카히로를 이겨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실로 우리민족의 아픔을 달래준 선수이기에 유명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은 구설수에 올랐는데 아무리 당시 한일전에서 승리한 자전거 우승자라 하더라고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지않아 항일투사로 보기 어렵고 , 자국국민의 자전거를 훔쳐 팔아온 범죄자인데 이를 미화했기 때문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엄복동이 1922년 경성시민대운동회에서 개최된 전 조선 자전거 대회에서 우승할 기미를 보이자, 일본 심판들은 날이 저물었다는 빌미로 경기를 중단시키는 등 비상식적인 판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에 격분한 엄복동은 본부석으로 뛰어든 뒤, 우승기를 잡고 꺾어버림으로써 항의했다고 하지요. 이 일로 일본인 관객과 조선인 관객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났을 정도로 엄복동은 조선인들에게는 영웅이었던 것은 사실 입니다. 다만, 그가 1950년에는 자전거를 훔쳐서 입건됐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고 하는 기록이 이쓴데 당시 기사에는 그가 양주 회천면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지만 생활이 궁핍해 끼니를 잇기 어려웠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보아서 아마도 생활형 범죄 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느 누구나 어두운 면은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제강점기 때의 엄복동 인물에 대한 평가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엄복동은 자전거 타기를 잘하여 일제강점기 당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에 기여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그가 자전거 도둑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그가 일제 강점기 당시 경찰서에서 자전거를 훔쳐다가 독립운동가에게 팔아 수익을 얻는 일도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엄복동은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독립운동 내부에서도 비판을 받았고, 자전거 도난으로 인해 상대방에게 피해를 준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엄복동이 독립운동에 기여한 측면도 있습니다. 엄복동은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자전거를 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전거를 이용한 독립운동 활동은 매우 위험하고, 도전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엄복동은 자전거를 타고 일제의 경계를 뚫고, 국민들이 일제강점기에도 독립을 추구하는 의지를 보여준 측면도 있습니다.
따라서, 엄복동 인물의 평가는 다양한 의견이 있으며, 역사적 사실과 영화에서의 표현은 분명히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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