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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로운꿀벌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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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영부인 애비타의 생애가 궁금해요

가장 극적으로 살아갔다는

아르헨티나후안페론 대통령 영부인

애비타의 삶을 알고싶어요

그녀의 평가는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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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빈민층 출신인 에비타는 온갖 역경을 딛고 '국모'가 된 후 노동자와 서민들을 위해 파격적인 복지정책을 내놓아 국민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런 선심성 정책으로 나라 경제를 피폐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습니다.
    에바는 1919년에 아르헨티나의 시골 마을 로스 톨도스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가난하고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녀는 15세 때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무작정 상경하여 홀로 힘들게 지내던 중 1943년 당시 육군 대령이던 후안 페론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페론의 출세를 위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러자 페론은 헌신적인 그녀에게 신뢰와 사랑을 느껴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1946년 2월 대통령 선거에서 페론이 당선되자 에바 페론은 남편을 설득하여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를 그대로 본뜬 '페론주의'를 내걸었다.

    1973년 10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은 '에바 시절'을 그리워하는 노동자들과 여성들과 빈민
    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재선되었습니다. 다시 정권을 잡은 후안 페론은 망명지에서 결혼한 이사벨 페론을 부통령직에 앉히고, 페론주의를 다시 부활시키고자 했으나 대통령직을 수행한 지 불과 10달도 못 되어 페론은 사망하였습니다.

    페론의 죽음으로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이사벨 페론은 '에바'의 관을 대통령 관저로 옮겨와 자신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확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사벨 페론은 대통령이 된 지 21개월 만에 쿠데타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영부인이 된 에비타는 어린시절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하여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극장에서 무명배우 생활을 하다가 라디오 성우로 활약하면서 일약 스타로 발돋움 하였으며 후안페론 장군 겸 노동부장관과 열애에 빠지게 됩니다. 1946.2월 후안페론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편을 설득하여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를 그대로 본떠 페론주의를 주창하게 합니다. 노동입법추진 노동자들의 처우개선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인상 및 여성 시민들의 지위향상 친권과 혼인에서 남녀평등보장 등을 이뤄내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다가 우상화작업을 통해 권력의 정점에 이르자 권력을 통해 정부 주요요직을 마음대로 주므르고 그녀에게 대적하려는 정치가들을 탄압했으며 무리한 중공업추친과 정부의 부패 사치와 향락으로 타락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결국 척수백혈병에 자궁암까지 겹쳐 3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한달간 성대히 치뤄졌으나 후안페론이 섣부르게 카톨릭 교회를 탄압하다가 1955년 군부쿠데타로 인해 망명길에 오르면서 그녀의 시신도 이리저리 옮겨졌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40년대 중반 후안 페론 대통령의 부인인 에바 페론(Eva Peron)은 애칭인 '에비타(Evita Peron)'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에바는 1919년에 아르헨티나의 시골 마을 로스 톨도스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가난하고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15세 때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무작정 상경하여 홀로 힘들게 지내던 중 1943년 당시 육군 대령이던 후안 페론을 만났다. 그녀는 페론의 출세를 위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자 페론은 헌신적인 그녀에게 신뢰와 사랑을 느껴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1946년 2월 대통령 선거에서 페론이 당선되자 에바 페론은 남편을 설득하여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를 그대로 본뜬 '페론주의'를 내걸었다.


    '페론주의'하에서 외국자본의 추방, 기간 산업의 국유화,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한 노동입법 추진, 노동자 생활 수준 향상, 여성 노동자의 임금 인상 및 여성 시민적 지위 개선, 친권과 혼인에서의 남녀 평등의 헌법 보장, 이혼의 권리를 명시한 가족법 추진, 여성의 공무담임권 획득 등을 이뤄내 노동자와 여성.빈민들이 그녀를 후원하고 지지하였다.


    이렇듯 폭넓은 민중적 지지 및 정치적 권력 기반이 서자 그녀는 남편과 자신의 우상화 작업에 착수했다. 초등학생들로 하여금 매주 페론 부부를 찬양하고 기리는 글짓기 숙제를 하도록 하였으며, 스페인어 수업 시간에는 에바의 자서전 <내 인생의 사명>(상당부분이 사실과 다름)을 교재로 채택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녀는 정부의 주요 요직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그녀에게 대적하려는 정치가들을 핍박하였다. 무엇보다도 군대를 비대하게 증강시켰으며, 무리하게 중공업 계획을 추진하였고 그녀의 사치스런 생활과 정부의 부패가 기승을 부렸다. 그에 따라 경제 상황은 눈에 띄게 악화되어 갔으며, 국민들은 높은 물가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척수백혈병에다 자궁암까지 겹쳐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녀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한달 간 성대히 치뤄졌다. 그러나 후안 페론이 가톨릭 교회를 섣불리 탄압하다가, 1955년에 군부에 의해 쫓겨 망명길에 오름에 따라, 그녀의 시신도 그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페론주의의 부활을 염려한 민주파 군부 지도자들이 그녀의 시신을 훔쳐 멀리 이탈리아로 옮겨 숨겨 버렸다. 그러자, 노동자들과 여성들로 이루어진 군대 페론주의자들이 군부에 압력을 넣어, 그녀의 시신을 그 당시 마드리드에 망명 중에 있던 후안 페론에게 넘기도록 했다.


    1973년 10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은 '에바 시절'을 그리워하는 노동자들과 여성들과 빈민

    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다시 정권을 잡은 후안 페론은 망명지에서 결혼한 이사벨 페론을 부통령직에 앉히고, 페론주의를 다시 부활시키고자 했으나 대통령직을 수행한 지 불과 10달도 못 되어 페론은 사망하였다.


    페론의 죽음으로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이사벨 페론은 '에바'의 관을 대통령 관저로 옮겨와 자신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확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사벨 페론은 대통령이 된 지 21개월 만에 쿠데타로 물러나고 말았다.


    새 정부가 들어 선 뒤에, 에바 페론의 시신은 레콜레타 공동묘지의 가족 묘역으로 옮겨졌다. 죽은 지 24년 만의 일이었다.


    빈민층 출신인 에비타는 온갖 역경을 딛고 '국모'가 된 후 노동자와 서민들을 위해 파격적인 복지정책을 내놓아 국민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런 선심성 정책으로 나라 경제를 피폐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출처 : 시사상식사전



  •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녀의 풀네임은 María Eva Duarte de Perón(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페론)입니다.

    애칭으로 Evita(에비타)라 불렸죠.

    에비타 페론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연기자로 활동하다, 후안 도밍고 페로네스의 아내가 되었죠.

    Eva Peron

    남편이 대통령이 되고, 아르헨티나의 정치를 노동자와 여성의 권리를 높이는 쪽으로 '사회적 행복성장'정책을 이끌어낸 사람입니다.

    여성의 선거권, 연금제도, 무상의료를 시행하는 병원, 보호소, 복지시설, 평생교육을 시작했죠.

    그녀의 정치적 활동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졌습니다.

    그러나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아르헨티나 시민들은 그녀를 추앙하고, 그녀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런 정치적 활동은 의회주의가 아닌 대통령부부의 결단이었고,

    결국 군부 구테타의 원인을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어머니라고도 불리는 에바 페론(Eva Perón)​ 에비타(Evita)​라는 애칭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풀 네임은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데 페론(María Eva Duarte de Perón)입니다. 1919년 5월 7일에 태어나 1952년 7월 26일에 사망하였고,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었던 후안 페론의 두번째 부인이자 아르헨티나의 영부인이었습니다. 노동자 및 하층민들을 위한 복지 정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고, 실질적으로는 보건부 장관의 역할을 해냈다고 합니다. 영부인으로서 외국에서 자선활동을 하기도 하였는데요. 스페인에서는 가난한 아동들을 위한 구호 활동을, 프랑스에서는 식량 지원을 약속 하기도 했답니다. 그야 말고 아르헨티나의 국모 라고 할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