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족이라는 사상은 언제부터 자리잡은건가요?
중국을 보면 여러민족이 섞여서 살고 있는데 중화라고 해서 가장 중심이 되는 한인? 중심의 이상한 민족차별주의 문화는 언제부터 만들어지게 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국 정부는 국가통합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위하여 수많은 소수민족을 하나의 중국에 통합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민족식별 사업이 이루어진 뒤에 중국공산당이 ‘중화민족’(中華民族)이라는 새로운 민족개념을 이론화하는 시도도 바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1988년 중국의 사회인류학자 페이샤오통(費孝通)이 제기한 ‘중화민족다원일론’(中華民族多元一論)은 당시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개혁 · 개방 정책으로 인한 정체성의 혼란 등으로 민족문제에 고심하던 중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페이샤오통이 주창한 ‘중화민족다원일론’이란 중국의 각 민족이 오랜 역사를 통하여 중원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세계’(中華世界)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투쟁하면서 동일한 세계의 구성원이란 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족(漢族)은 오랜 역사 속에서 이미 여러 민족들이 융합하여 형성된 민족이고 한때 중원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던 몽골족, 만주족 등이나 투쟁에 참여하였던 회족(回族) 등도 다원적인 통일을 이루어 중화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중원 지역을 둘러싸고 존재하였던 많은 민족들이 “네가 오면 내가 물러나고, 내가 오면 네가 가는(你來我去, 我來你去)” 과정을 거쳐 “내 속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는(我中有你, 你中有我)” 상태가 되어 이제 중화민족(中華民族)으로서 다원적 통일(“多元一”)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중화민족’이란 “한족(漢族)을 주체로 하고 55개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하나의 새로운 큰 민족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1) 하지만 이러한 민족개념은 ‘중화민족’이라는 실체가 현실 세계에서 아직 충분하게 구체화되지 않았기에 다분히 정치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 신강 지역 위구르족의 분리 독립 추진 움직임(이른바 ‘동투르키스탄 문제’) 및 티베트 문제 등 소수민족 문제로 큰 정치적 부담을 갖게 된 상황에서 중국의 국가적 통일성 및 국가통합의 방향성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크다고 보인다. 따라서 중화민족론은 정치적 실체로서의 국가와 문화적 공동체로서의 민족을 혼동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2)[네이버 지식백과] ‘중화민족(中華民族)’ 개념의 부상 (중국 소수민족 연구, 2007. 6. 30., 정재남)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나라의 옹정제 같은 경우, 동이[8] 출신의 순 임금과, 서융 출신의 주문왕[9]을 거론하며, 이들도 한족 질서에 편입될 수 있었음을 《대의각미록》에서 주장하여 청나라의 정당성을 삼는 근거로 내세웠다. 한족 항목에서 볼 수 있듯, 실제로 남중국과 북중국은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제법 큰 차이가 있음에도, 역대 중국의 국가들은 '중화'의 범위로 이들을 묶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는 만주족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면이 강한 주장으로, 정작 한족 신사[10] 계층이 청 황실을 오랑캐라고 보는 관점은 청 말기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이들 한족 신사층은 지방에 웅거하면서도, '멸만흥한(滅滿興漢; 만주족을 멸절시키고 한족을 부흥시킨다)'을 표방하며 언젠가 '오랑캐의 지배'를 뒤엎을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고, 그것이 대대적으로 폭발한 것이 이른바 태평천국의 난이다[11]. 이는 외세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다고 인식하고 있다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이념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근대적 민족구분이 없던 상태의 근대 중국에 민족주의가 유입되면서 이런 인식도 생겨났다. 아무튼 청나라가 안정된 뒤에도 한족에 대한 강경책과 탄압이 완전히 사그라진 건 아니었다. 문자의 옥 항목 참조. 다만 당시의 민족 탄압은 근대적 민족주의가 적용된 형태는 아니었고 민족간의 경계도 애매했다고 한다. 중화주의가 민족주의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보통 태평천국의 난 전후로 본다.
현대에도 중화사상은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고 있다. 우선 종족 혁명론에 근거해서 반청복명을 주장하던 한족들이 자신들이 권력을 잡고나자 중화민족 개념을 급조해서 한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걸 정당화했다는 점이 대표적인 예다.
물론 이민족 왕조의 경우는 이민족이라는 이유로, 잘한 점은 덜 인정받고 한족 왕조와 똑같은 병크를 저질러도 더 까이는 성향은 컸지만, 하여튼 청나라 말기의 혁명파들은 청나라의 지배기간을 한족이 식민지배당하는 것으로 해석하며, 신해혁명은 한족의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근대적 민족주의를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현대 중국에서는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기 위해 정 반대의 주장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 서구의 개념인 민족과 식민지에 대해 당시 중국에서는 여러 해석이 나왔는데, 특히 중화라는 개념이 근대적 민족주의로 따지면 어디까지의 범위인가 하는 것이다.
반청복명의 혁명파들의 주장은 장빙린의 종족 혁명론에 근거한 해석이었다. 종족 혁명론은 한족만이 중화로 여겨질 수 있기에 수준 낮은 이민족을 배척해야 한다는 관점인데, 그래도 장빙린은 '한족과 만주, 몽골, 티벳, 위구르가 모두 별개의 나라가 되어야 하므로 한족이 새 나라를 세우고 나면 다른 민족들도 알아서 독립해서 나라를 세우라'는 나름 공평하고 쿨한 태도였다(...). 다만 이후 중화주의와 한족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다른 세력의 주장에 밀려 오족공화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반면에 개혁파들은 청 왕조도 중화에 포함할 수 있다면서 혁명파의 이 주장을 반박했다. 삼합회(三合會)의 시초가 되었다는 말도 있는 홍문(洪門)은 명나라 말기~청나라 초기에 일어난 비밀결사(秘密結社)로, "반청복명"(反清復明, 청을 몰아내고 명을 부활시킨다)를 모토로 삼는다. 이후 홍문은 모든 산당(山堂)과 반청조직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 되었다.[12] 이러한 '멸만흥한' 이념이나 조선 및 베트남 등에서 내세운 소중화 사상은, 오랑캐로 일컬어지는 외래인 중심의 지배를 부정하는 기조에서 성립된 것으로, 뿌리 깊은 중화사상 하에서 정통 중화인이 아닌 오랑캐를 질서의 정점에 세우는 것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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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사상은 통일적인 민족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춘추전국시대에 형성되기 시작해 유가사상이 국가의 통치 철학으로 자리잡은 한 시대에 이르러 체계화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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