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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호저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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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은 왜 셋째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줬나요?

칭키즈칸은 가장 넓은 대륙을 정벌했던 지배자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첫째 아들에게 자리를 넘겨주나 칭기즈칸은 셋째 아들한테 자리를 넘겨줬는데 이 배경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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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주치는 무난했고 차가타이는 정석이었지만 인색했고, 어거데이는 원만하고 너그러웠으나 술을 좋아하고 연회를 즐겼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많이 들었는데, 막내 툴루이는 전투에 능하나 잔인했습니다.

    칭기즈 칸은 훗날 탕쿠트 원정 중 죽을 때 어거데이를 후계자로 지명하며 나머지 아들을 평가하는데

    사냥을 좋아하는 사람은 주치와 함께 가도록하라, 자사크와 관례에 대해 알고싶으면 차가타이에게로 가라, 은사와 재화를 원하는 사람은 어거데이를 가까이 하라, 승전과 정복을 희망하는 사람은 툴루이를 모시도록 하라

    창업자 칭기즈 칸이 후계를 정할때 최우선 사항으로 자신이 이룬 제국을 안정적으로 다스리고 자신의 이념이 오래 보존되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 셋째 아들이 적임자였습니다.

    칸의 판단은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는 우선 황금씨족-칭기즈칸 일족의 화합이 중요하다 생각해 주치와 차가타이는 우선 배제, 툴루이는 전투능력은 아버지와 닯았고 자기 옆에서 가장 많이 있기도 했으나 세 형들이 막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기준으로 이미 거대제국이 된 몽골은 힘에 의한 정복보다 타협과 소통, 넉넉한 포용을 필요로 했으므로 이 두가지 항복에서 어거데이가 가장 경쟁력 있다고 보았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칭기즈칸이 1220년 경에 머무르며 중국 원정을 위한 본거지로 삼아 몽골 제국의 시작을 열었던 곳으로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이곳을 1235년에 몽골제국의 수도로 건설했습니다. 칭기즈칸은 그의 아들 중 첫째와 둘째가 대칸 자리를 두고 격하게 싸우니 그 중 지적이며 온건하던 셋째 아들에게 대칸 의 자리 황위를 물려주었다고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칭기스칸이 건강할 때인 죽기 8년 전 후계자 논의를 하게 됩니다. 그 당시 칭기스칸이 가장 사랑했던 세 번째부인인 예수이 카툰이 부담없이 후계자 결정을 꺼냈습니다. 이때 장남 조치와 차남 차카타이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고 이 싸움은 몽골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거대한 싸움의 도화선이 됩니다. 1221년 호라즘 정복 중에도 서로 분쟁하였습니다.주치와 차카티이의 분쟁이 계속되자 칭기스칸은 오고타이와 툴루이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낙점했고 주치와 차카타이 둘다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적정자 후계구도를 지키지 않은 이유는 칭기스칸의 첫째부인 보르테가 납치를 당한 적이 있어서 자신의 혈육임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징기스칸은 4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주치, 차카타이, 오고타이, 툴루이입니다.

    그런데, 첫째 주치는 친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집사>에 따르면 첫번째 부인 보르테는 메리키트 부족들의 급습을 받아 끌려가 다시 찾아오지만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징키즈칸은 주치에 대해 출생의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성격이 선량하지만 내성적이었으며, 둘째 차카타이가 칸 즉위에 극력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칭기즈칸의 판단에 의하면, 둘째 차카타이는 비록 용맹하고 강하지만 겸허함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세째 오고타이는 열정적이고 호방하며 처세에 지혜가 있었으며 결점이 없었다고 합니다. 네째 툴루이는 아직 어려 여러 사람을 복종시키기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