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미술 이미지
미술학문
미술 이미지
미술학문
까칠한고릴라5
까칠한고릴라523.08.23

미켈란젤로가 어떠한 인물인지가 궁금합니다.

예술적으로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어떠한 것들이 있고 어떠한 여생을 살았는지가 궁금합니다. 얼마나 살았는지도 알려주세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7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2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켈란젤로(1475.3.6. ~ 1564.2.18.)이탈리아의 예술가입니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다비드, 천지창조 등의 인류 문화유산을 남긴 천재 예술가이다. 조각가였으나 교황의 요청으로 천장 벽화에 도전하며 완벽한 회화 능력까지 보여줬다. 미켈란젤로가 남긴 작품들을 살펴보며 르네상스를 이끌었습니다.

    1994.4.8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가 시스티나 성당에서 복원돼 일반에 공개됩니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화가 복원 된 후, 로마의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대중들에게 이 작품을 공개한 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몸으로 이루어진 신학의 거룩한 성소"라고 말했다.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성당으로 바티칸 궁전 내부에 건축되었습니다.

    당시 보티첼리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이 참여하여 프레스코화를 그렸고, 미켈란젤로는 성당의 천장화와 벽화를 그렸습니다. 이른바 화룡점정인 셈입니다. 이 불멸의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살았던 16세기 작품이다. 이제 500년이나 지난 천장화를 복원해 낸 현대인들 역시 그 작업을 하면서 미켈란젤로라는 한 인간에 대한 경외감을 품었다. 세월 앞에 인간의 목숨은 부질없지만, 예술은 영원하다는 말이 증명된 셈입니다.

    그의 작품은 아담의 창조, 레다와 백조, 인생의 꿈, 시스틴 예배당 천장화, 최후의 심판 시스티나 예배당의 제단 위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 천지창조: 노아의 감사제물, 원죄와 낙원에서의 추방, 심문과 벌을 받는 아담과 이브 등이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6일~1564년 2월 14일 향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조각가이자 건축가, 화가, 시인으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거장 중 한명입니다.

    1475년 3월 6일 카센티노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로도비코 부오나로티와 어머니 프란체스카 부오나로티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병약해 그가 6살때 세상을 떠나 어렸을 때 시골에 있는 유모의 집에 맡겨졌는데 유모의 남편은 세티냐노의 석수장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그가 후에 조각가로서의 재능이 가장 두드러지게 되는데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미켈란젤로 본인도 후에 자신의 글에서 어렸을때부터 조각용 끌과 망치를 갖고 노는게 가장 즐거웠다고 합니다.

    그의 소년시절은 순탄치 못했는데 피렌체에서 공부하던 때에는 마을 행정관인 아버지 로도비코 디 레오나르도 디 부오나로티 시모니는 미켈란젤로를 예술가로 키우는걸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당시 피렌체에는 상업이 매우 발달하고 있어 상업거래에 따른 계약서의 공증업무가 많았는데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바로 그 공증업에 종사했습니다. 그의 젊은 시절 유럽의 예술가들도 취급이 딱히 좋은 편이 아니여서 몰락 귀족이라도 귀족이라는 자존심이 있던 아버지는 그가 공부로 할수있는 직업을 갖길 원했습니다.

    아버지와 삼촌들에게 두들겨 맞고 여러 차례 혼도 났지만 그는 자신의 예술혼이 불타오르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고, 아버지와 삼촌들이 결국 초기, 그가 후에 아버지에게 쓴 편지들을 보면 아버지는 제가 번 돈으로 군주와 같은 생활을 하실 수 있다 라고 쓸 정도로 경제적으로 성공합니다. 아버지 뿐 아니라 그의형제들도 그의 덕을 보는데 그의 형제에게 쓴 편지에서도 본인이 가게를 차려 줄 테니 다른 짓 하지 말라고 쓴 내용이 있습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허락으로 13세 당시 유명했던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 들어가지만 1년만에 나오는데 이유는 스승의 능력이 성에 차지 않았다고 사며, 사실 시를란다요의 능력이 떨어졌다기 보다 그가 너무 뛰어난것입니다. 또한 회화보다 조각에 더 흥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의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 가문, 당시 메디치 가문의 수장 로렌초 데 메디치의 초빙에 의해 그는 15살에 팔라초 메디치에서 공부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는 연습작들을 몇개 만드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판의 얼굴과 큐피드입니다.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본 로렌초의 배려로 메디치 가에서 몇년동안 지내게 된 소년 미켈란젤로는 로렌초 및 그의 아들들과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파격적인 우대를 받았고, 로렌초의 아들들을 가르치기 위해 초빙된 당대의 유명인사들과 학자들을 만나 플라톤 철학을 배우고, 그들에게서 수준 높은 토론을 경청, 라틴어, 문학에 대해서도 수준 높은 소양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로렌초가 사망 후 그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고 미켈란젤로는 직감적으로 떠나야 할때임을 알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카노사 출신의 귀족 로도비코 디 리오나르도 부오나로티 시모니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 사이에서 토스카나 지방 아레초 북부의 카프레세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1488년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돌아왔는데, 유년 시절부터 조토마사치오의 작품들을 습작하며 그림에 많은 관심을 쏟아 집안에서 자주 꾸중을 들었습니다. 집안에서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싫어한 이유는 조선시대에 화가들이 사대부들에게 사소한 기술에 능한 환쟁이라고 불리며 멸시받은 것처럼, 미켈란젤로 시대의 화가들도 예술가로 존경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년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 가에서 아버지를 설득해준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미술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13세 때 화가 도메니코와 기를란다요에게서 배우고, 이듬해 조각가 베를톨드에게 옮겨 도나텔로 작품을 배움과 아울러 메디치 가의 고대 조각품을 수집 연구하던 중 선생의 추천으로 피렌체의 실력자이자 예술가들을 후원하던 메디치 가문이 거느리고 있는 화가 집단에 들어가 대 로렌초의 총애를 받습니다. 그 집에서 조각과 인체 해부에 전념하며 그는 신화와 신·구약 성서 등 많은 고전을 탐독하고 교양을 쌓았습니다. 1496년 로마로 나가 고대 미술과 접하고 이교적인 바쿠스를 제작하였습니다. 1499년 프랑스 추기경의 위촉을 받아 성 베드로 대성전의 피에타를 완성하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예술적으로 매우 유명합니다. 그는 조각, 회화, 건축, 시,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습니다.

    미켈란젤로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 피에타 (1501-1504)

    • 다비드 (1501-1504)

    • 최후의 심판 (1536-1541)

    •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1508-1512)

    •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1546-1667)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 6일 이탈리아 카프레세에서 태어나 1564년 2월 18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88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16세기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추천 부탁드립니다. ^^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카프레세 출생.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나, 양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13세 때에 기를란다요(Ghirlandajo)에게 입문하였고, 이듬해 조각가 베르톨도(Bertoldo di Giovanni:1420?∼1491)에게로 옮겨 도나텔로의 작품을 배우면서, 메디치가(家)의 고대 조각을 연구하였다. 그 때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1449∼1492)에게 인정받아, 그의 집에서 체류하게 되어, 인문 학자들과도 접촉, 고전문학이나 신구약 성서를 탐독함과 동시에, 조각을 위한 인체 해부에도 전념하였다. 블랑카치성당 마사초의 벽화 앞에서 토레지아니와 논쟁하다가 코뼈가 부러진 것도 그 때의 일이며, 이때의 작품으로는 피렌체의 카사 보나로티에 남아 있는 도나텔로풍의 《스칼라의 성모》와 고전적 격조를 보인 《켄타우로스족과 라피타이족의 싸움》의 부조(浮彫)가 있다. 1492년 메디치가의 로렌초가 죽은 후, 프랑스군이 침입하자 볼로냐로 피난, 거기서 J.d.퀘르치아의 조각도 배웠다.

    1496년 로마로 나올 기회를 얻어 고전 예술에 접촉, 조상 《바쿠스》(피렌체 바르젤로미술관 소장)를 제작, 바티칸의 산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피에타 Pieta》를 프랑스 추기경의 의뢰로 완성한 것은 1499년경이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시청으로부터 《다비드》의 대리석상을 부탁받아 1504년에 완성하였다. 이 거상은 시청 문 앞에 놓여 피렌체 자치 도시를 지키는 상징으로 간직되었다(현재는 아카데미아미술관 소장). 이 무렵의 작품으로 성모자(聖母子)를 다룬 2개의 원형 부조(런던 왕립미술아카데미와 바르젤로미술관 소장)와 원형화 《성가족》(우피치미술관)이 있다. 1504년 피렌체 시청에 《카시나의 싸움 Battle of Cascina》의 벽화를 의뢰받아, 건너편 벽면에 《안기리의 기마전》을 그리게 되어 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경쟁하였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듬해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 로마로 가서, 그 기념 묘비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브라만테가 산피에트로대성당의 개축에 착수한 이래, 율리우스 2세가 냉담해지자, 이에 성이 난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다시 《카시나의 싸움》 제작에 전념하였다.

    1506년 레오나르도도 화고(畵稿)를 완성, 벽화를 착수하였으나, 쌍방 모두 진전이 없던 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지금은 화고도 없어지고, 모사화(模寫畵)가 남아 있을 뿐이다. 1506년 말 미켈란젤로는 다시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가, 볼로냐에서 화해하고, 1508년 시스티나성당의 천장화(天障畵)를 위촉받았다. 벽화에는 경험이 없다고 사퇴하였으나, 허용되지 않아 적대자 브라만테의 간계를 물리치면서 제작을 시작하였다. 일은 진척되지 않고, 보수도 지불되지 않고, 형제들로부터는 금전을 강요당하고, 교황과도 충돌하는 악조건하에서 1512년에 마침내 완성하였다. 《천지 창조》 《인간의 타락》 《노아 이야기》의 3장 9화면을 구약 내용의 순서와는 반대로 그리기 시작, 그 화면 사이에 예언자나 천사(天使)나 역사(力士)를 배치하고, 복잡한 모습을 부여하여, 묘사된 대리석상 같은 인간군상을 부각하였다. 천장화 완성의 다음해에 율리우스 2세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현안의 묘비를 실현시키게 되어, 1513∼1518년에 묘비의 중심조상(彫像)이 될 《모세 Moses》의 거상(巨像)과 부속 인물인 《노예》를 만들었으나,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가 새로이 피렌체의 산 로렌초성당의 파사드의 건축을 강요하였기 때문에, 그 후 율리우스 2세의 묘비는 중단되었다.

    교황이 갈릴 때마다 계약이 수정되어 마침내 1542년의 제5회째의 계약에서는 최초의 거대한 구상과는 달리, 앞서 말한 《모세》를 중심으로 새로이 만든 《레아》와 《라헬》의 두 협시(脇侍)가 산 피에트로 인 빈코리성당의 쓸쓸한 묘비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1520년 피렌체의 메디치가 묘묘(廟墓)의 제작을 의뢰받아, 1524년에 착수, 10년간이나 걸렸으나 끝내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묘묘를 구성하는 로렌초와 줄리아노의 조상과 그 각각의 아래의 관(棺)에 누워 있는 《아침》 《저녁》 《낮》 《밤》의 네 우의상(寓意像), 그 중 《저녁》과 《낮》의 두 남성상(미완성)과 《성모자상》(미완성)은 르네상스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 사이 산 로렌초성당 부속의 라우렌치아나도서관의 건축에 종사하였고, 1529년에는 독일의 칼 5세군(軍)의 피렌체 포위를 맞아, 방위위원으로서 축성에도 임하였다. 그 후 메디치가(家)의 전제군주 알렉산드로와 반목하여, 메디치가 묘묘를 미완성의 상태로 둔 채 1534년에 피렌체와 영원히 결별하여 로마로 옮겼다. 그 해 새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성당의 안쪽 벽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다음 해부터 혼자 착수, 고생 끝에 6년 후인 1541년에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을 완성하였다.

    그리스도가 ‘성난 그리스도’로서 거인처럼 군림하여, 천국에 오르는 자와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가 좌우로 크게 회전하는 군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 구도(構圖)와 동적 표현은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을 해체하여 격정적인 바로크 양식의 추이(推移)를 보였다. 그 제작 중, 독신이었던 그가 교양 높은 페스카라공(公) 미망인 비토리아 코론나를 알게 되어 영혼의 위로를 받게 된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인데, 이 부인도 타계하여, 그는 다시 고독해졌다. 1542년에는 바티칸궁의 파올리나성당의 장식도 위촉받아 《바울로의 개종》과 《베드로의 책형(磔刑)》을 1550년에 완성하였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캄피돌리오 광장을 설계하기도 하고, 파라초 파르네제의 건축에 종사하기도 하는 등 끊임없이 활동하여, 1547년에는 산 피에트로대성당의 조영 주임이 되어 1557년 대원개(大圓蓋)의 목제 모델을 완성하였다.

    그 사이에도 《피에타 Pieta》의 군상을 3체(體)(피렌체 대성당, 팔레스토리나, 론다니니)나 만들었고, 어느 것이나 미완성으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힘 없이 쓰러지는 그리스도를 성모들이 슬피 부축하는 군상의 생생한 끌 자국에는 끝없는 고뇌의 영혼이 영원의 휴식을 추구하는 것 같은 그의 만년의 심경이 엿보여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 무렵 로마에도 동란이 일어나, 고향 피렌체에 대한 향수에 젖으면서, 병을 얻어 르네상스로부터 초기 바로크에 이르는 89세의 오랜 예술적 생애를 마쳤다. 메디치가(家)나 교황에 봉사를 끝없이 요구당하면서도 언제나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여 싸운 그의 괴로운 심경은 남겨진 편지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예술은 모두 이와 같은 인생의 고뇌와 사회의 부정과 대결한 분개와 우울과 신앙의 미적 형상화이며, 더욱이 그것은 초인적인 억센 제작력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출처 : 두산백과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16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화가이며 조각가로 주요 작품은 <다비드>와 <피에타>. 1475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 13세에 미술을 배우기 위해 도제로 들어갔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여 로렌초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으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 조각과 회화에 몰두했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가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대표작이나, 사실 미켈란젤로는 평생을 조각에 몰두했다. 회화 작품으로는 <시스티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 등이 대표적이다. 이후 베르니니와 루벤스, 로댕 등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

  •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예술가로, 조각가, 화가, 건축가 등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입니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윗": 대리석으로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대표작 중 하나로, 다윗의 완벽한 체형과 강한 의지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천장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장식한 작품으로, 창조와 인간의 역사를 표현한 장대한 벽화입니다.

    "사도들의 신부": 미켈란젤로가 그린 작품 중 하나로, 예수의 십이 사도와 그의 수제자 마리아 막달레나를 다루었습니다.

    "성존모와 아이 예수": 그림으로 그린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 하나로, 부드럽고 섬세한 감정 표현이 특징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아티스트로서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흥미로운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자존심과 야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예술과 정치, 종교적 문제에 대한 사상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의 열정과 완벽주의적인 성향으로 유명했으며, 작품과 개인적 삶의 여정에서도 많은 도전과 역경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 6일에 태어나 1564년 2월 18일에 별세했으므로, 약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