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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러스
사일러스23.07.01

사육신과 관련된 삼중신은 어떤 인물들이었나요?

사육신과 관련되어서 처벌받은 사람들도 70명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육신의 거사가 상당히 규모가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하더군요.

사육신과 관련된 '삼중신'도 상당한 비중이 있는 인물들이었다고 하는데,

정작 삼중신은 언급조차 없는데,

어떤 인물들이었고, 실제로는 어떤 역할을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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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삼중신 - 단종복위 운동.

    * 삼중신(三重臣).

    ㅇ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端宗)을 복위하기

    위해서, 사육신(死六臣),생육신(生六臣)을 제외하고, 희생당한, 정승급의 고위직 3명의 신하.

    김문기( 공조판서 ). 민신(이조판서 ).조극관( 병조판서 )를 말함.

    * 사육신(死六臣)

    ㅇ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찬탈당한 단종(端宗: 제 6대왕) 을 위해서 희생한 6명의 신하.

    성삼문. 유성원.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

    (김문기를 포함해서, 사칠신이라고 역사가들은 부르기도 함.)

    * 생육신( 生六臣 ).

    ㅇ 수양대군에게 왕위찬탈당한 단종을 위해서, 죽음을 면했지만,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평생동안

    수양대군(세조)를 저주하면서,단종을 그리워 하며, 일생을 바친 6명의 신하.

    김시습. 원호. 조려.성담수. 이맹전. 남효온.

    * 계유정난(癸酉靖難).

    ㅇ 1453.(단종 1.)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를 제거하고, 스스로 영의정 자리에 올라, 조정의 실권을 잡음.

    1455.(단종 3.) 자신의 추종세력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등에 의하여, 추대를 받아,

    조선 제 6대왕에 등극(登極)합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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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중신은 계유정난으로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고종을 복위하기 위해 사육신, 생육신을 제외하고 희생당한 정승급의 고위직 3명의 신하로 김문기, 민신, 조극관 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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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조15년(1791) 정조는 국가 기본

    의전록(儀典錄)인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찬할 때,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판서급 중신, 즉 계유정란때 희생된 이조판서 민신(閔伸),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과 함께 공조판서

    김문기도 꼽아 삼중신(三重臣)이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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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01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민신

    세종 대에 장령·승지·공조참판·형조참판·대사헌 등을 지냈다. 1443년(세종 25)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민신(閔伸)·정창손(鄭昌孫)·하위지(河緯地)·양성지(梁誠之) 등과 함께 공법(貢法)을 논의하였다.


    문종 때 병조판서를 지내고 1453년(단종 1) 이조판서가 되었다.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어린 임금 단종을 보호하기 위하여 애쓰다가, 왕위를 엿보고 있던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의 적이 되었다.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부사(副使)로 지목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따라가지 않았다. 그해 10월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죽일 때, 수양대군의 심복인 정수충(鄭守忠)에 의하여, 일찍이 남몰래 안평대군과 사귀었으므로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으로 혐의를 받았다.


    수양대군의 명을 받은 삼군진무(三軍鎭撫) 서조(徐遭)에 의하여 현릉(顯陵: 문종의 능) 비역(碑役)을 감독하던 중 참살되었다.


    정조 때 관작이 회복, 신원되었다. 삼중신(三重臣)이라는 예칭(譽稱)으로 불린다. 공주 동학사에 있는 숙모전(肅慕殿)과 장릉(莊陵) 충신각(忠臣閣)에 배향되었다.


    김문기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당대에는 본관을 김해(金海)로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그 후손들이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구별하기 위하여 김녕(金寧)과 경주(慶州)로 사용하는 두 파로 갈려졌다. 아버지는 김관(金觀)이다.


    1426년(세종 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하였다. 1430년 예문관검열, 1436년 사간원좌헌납을 거쳐, 1445년에 함길도도절제사인 박종우(朴從愚)의 천거로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1447년에 이질로 군무에 장기간 복무할 수 없게되자 내직으로 들어와 1448년에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


    1450년 병조참의를 거쳐, 1451년(문종 1) 함길도도관찰사에 임명되자 임지에 가서 안변·정평 등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1453년(단종 1)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외직인 함길도도절제사로 나갔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차사원(差使員)과 힘을 합쳐 유시에 따라 온성의 읍성을 축조하는 공사에 공을 세웠다. 그 해 또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다음 해인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주살당할 때, 김문기도 이 사건에 관련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단종 복위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 6인의 절의(節義)를 ‘사육신’이라 했으며, 사육신의 사실은 남효온(南孝溫)이 쓴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 실려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 뒤 1691년(숙종 17) 국가에서는 육신을 공인해 복관시켰고, 뒤따라 1731년(영조 7)에는 김문기를 복관하고 1757년에 충의(忠毅)란 시호를 내렸다.


    또한 1791년(정조 15)에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김문기는 삼중신(三重臣: 민신(閔伸)·조극관(趙克寬)·김문기)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고, 성삼문·박팽년·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하위지(河緯地) 등 6인은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대로 ‘사육신’에 선정되었다.


    『어정배식록』은 정조가 내각과 홍문관에 명령해 『세조실록(世祖實錄)』을 비롯한 국내의 공사 문적을 널리 고증해 신중히 결정한 국가적인 의전(儀典)이다.


    이 때 김문기에게는 앞서 1453년 계유옥사 때 사절(死節)한 이조판서 민신과 병조판서 조극관과 같은 판서급의 중신이라는 이유로 '삼중신'이란 칭호를 내린 것이었다.


    김문기의 사실을 기록한 『백촌유사(白村遺事)』 3책이 전하며,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향사되었다.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사육신 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가묘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 문제를 놓고 일부 학자들 사이에 찬반 양론이 벌어져 신문 지상에 그들의 논설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조극관

    1414년(태종 14) 알성문과에 을과 3등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에 등용되고, 1418년 정자(正字)에 승진하여 서연(書筵)에 나가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보필하던 중, 이 해 세자의 난행(亂行)을 막지 못한 죄로 파직되었다.


    그 뒤 1420년 (세종 2) 다시 우정언이 되고 지평(持平)을 거쳐 1426년 이조정랑이 되었다. 1427년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사헌부장령(司憲府將令)을 거쳐 1437년 지형조사(知刑曹事)가 되었고, 1441년 형조참의를 거쳐 우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공조참판을 지내고 1443년 평안도도관찰사가 되었다. 1446년 병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그 해 8월 황해도도체찰사가 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아 전라도 용안현(龍安縣)에 부처되었다.


    1449년 다시 예조참판에 기용되었고, 이 해 9월 요동지휘사(遼東指揮使) 왕무귀(王武貴)가 명제(明帝)의 조칙을 가지고 왔을 때 왕이 병으로 마중을 나가지 못하자, 왕을 대신해서 칙사를 맞이하였다.


    그 해 10월 형조판서에 올랐고, 12월 함길도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때 마침 침입해 온 야인들을 물리쳐 전공을 세웠고, 1451년(문종 1) 그 공으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을 때 함경도 일대에 축성을 해야만 국가의 이익이 된다는 것을 상계하여 성곽을 보수 또는 신축하고, 군사의 훈련제도를 강화하는 등 국방 경비에 힘을 기울였다.


    이 해 7월 형조판서와 대사헌을 거쳐 곧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얼마 뒤 우찬성이 되었다. 1453년 이조판서가 되었지만,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에 김종서(金宗瑞)의 일파로 몰려 피살되었다. 영조 때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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