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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런한오소니23
가지런한오소니2323.06.02

미국의 남북전쟁은 왜 일어난 것이며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요?

미국의 남북전쟁에 의해 링컨이 유명해지게 되었다고 하는데 미국의 남북전쟁은 왜 일어난 것이며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요?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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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남북전쟁의 결과

    남북전쟁에 이은 반세기 동안 남부는 재조정 시기를 맞이하였다. 백인들은 흑인들과 제도적으로 분리되어 지내기 전까지 해방된 흑인들에 대해 대안적인 대응방법을 모색했다. 흑인들 또한 그들 나름대로 남북전쟁이 끝나고 반세기가 지난 이후까지 자신들의 의지하고는 상관없는 변화를 경험해야 했다. 이 시기는 남부적인 태도와 미국 나머지 지역으로부터 고립되었다는 느낌이 더욱더 고착화된 시기이다.

    남북전쟁 전에 경제조직이 무너지면서 전후 12년에 걸친 재건시대(1865~1877) 동안 남부 지역 사람들은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 했다. 운송시설 및 제조업 생산 능력의 파괴는 별도로 하더라도 플랜테이션 경제가 이미 경직되고 노예 노동력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높은 세금과 재건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집중적인 자원 개발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개발하기에 가장 적합한 자원은 여전히 농지였다. 따라서 면화 생산이 이 지역 경제의 주도적인 산업으로 남게 되었다.

    그렇지만 생산에 필요한 다른 요소들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현지 자본은 전쟁 때 소모되었거나 전쟁 후 북부의 세금 징수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턱없이 부족했다. 이자율은 크게 올라갔으며 농부들은 계속 빚더미에 올라앉아야 했다. 이렇게 되어 남부는 계속 농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작은 읍내에서 구할 수 있는 직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농촌 지역의 흑인들은 어쩔 수 없이 백인 토지소유주와 어떤 식으로든 합의를 해야만 했다. 백인 소유주가 흑인들에게 외상으로 농기구, 씨앗, 거주지를 제공해주고 흑인들이 재배한 곡물로 이를 갚는 소작농 제도가 생존수단이면서 생활방식이 되었다. 이는 땅을 잃어버린 가난한 백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이러한 유형이 확립되자 농업 지역 밖으로 흑인들이 이동하는 것을 제한하는 ‘흑인법’이 강화되었고 흑인들의 교육수준은 계속 낮을 수밖에 없었다. 흑인 농부들은 자기 땅을 보유하게 되었을 때에도 은행에서 거의 대출을 받지 못했고, 농장 규모가 너무 작아 생산성을 높일 수도 없었으며, 더욱이 지역 문화 속에 담겨 있는 인종차별을 감수해야만 했다.

    1880년경에 남부의 경제 기회 환경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880년대 10년 동안 면직물 산업의 성장에 힘입어 제조업이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1929년에는 남부의 미국 면직물 점유율이 57퍼센트에 이르렀는데, 이는 1890년보다 2.5배 늘어난 것이다.

    직물산업이 의류제조업에 원료를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면직물 및 합성직물 제조업체에 원료를 제공하기 위한 자연섬유 및 합성섬유 산업 또한 미국 남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인접성을 이용하여 노스·사우스캐롤라이나주 산록지대와 조지아주 북부에서 면직물과 의류제조업이 성장했으며, 이 성장에 힘입어 섬유산업 업체와 생산량이 증가하게 되었다.

    면직물 제조업만이 산업성장의 기회를 새롭게 제공해준 것은 아니었다. 철도 재건설을 비롯한 기타 공공시설 개선 때문에 남부 지방의 자금 흐름이 원활해졌고, 철도에 인접한 마을들도 발전할 수 있었다. 담배제조업은 노스캐롤라이나주와 버지니아주 담배 재배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연방토지정책이 수립되고 철도망이 강화되면서 남부의 대규모 목재자원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많은 분량의 목재가 가공되지 않고 운송되었지만, 노스캐롤라이나주와 버지니아주의 가구제조업, 그리고 미국 남부 전체에서 1936년 이후부터 시작된 펄프 및 제지업은 크게 성장했다. 이런 산업들은 모두 지금까지도 남부의 중요한 산업을 이루고 있다.

    19세기 마지막 25년 동안에는 제철 기술이 발전하면서 테네시주 채터누가가 중요한 철 생산지로 부상했다. 동시에 고품질의 코크스용 석탄이 앨라배마주 버밍햄 인근에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 발견되어 곧바로 자원개발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제철업체들과 철과 강철을 이용한 산업들이 버밍햄과 채터누가를 중심으로 생겨났다. 이 두 도시는 운송 관련 산업 업체들이 집중되어 있는 조지아주 애틀랜타와 결합되어 19세기 말에 삼각형 모양의 중요한 산업 지역을 구성하게 되었다.

    철과 강철 생산은 강철에 의존하는 다른 제조업체들을 끌어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제철산업의 발달은 남부의 경제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런 산업들은 직물이나 담배 생산업체처럼 많은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임금이 낮은 산업도 아니었다. 또 이렇게 남부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비농업 경제발전 지역은 도시 지역과의 연결을 통해 노동 기술, 임금 수준, 일반적인 복지를 향상시켜 남부 전체의 산업중심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버밍햄에서 생산된 제품에 부가된 차별적인 선적 비용 때문에 이러한 이점이 제대로 활용될 수 없었다. 결국에는 차별적인 가격책정 관행이 불법으로 판결되어 중단됐지만, 이러한 가격정책 때문에 20세기 초반, 경제가 빠르게 확장하던 시기에 앨라배마주의 강철은 경쟁가격상 이점을 얻지 못해 산업 성장이 둔화되었다.

    1880년대 후반과 1890년대에 남부 사회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시키는 법률이 남부의 각 주에서 통과되었다. 공식적인 인종 분리는 지리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두 개의 다른 학교가 운영되었으며 식당, 편의시설, 공원 벤치, 식수대, 화장실, 그리고 기타 흑인과 백인이 접촉할 가능성이 있는 시설을 따로 설치해야 했다. 주거지도 백인 지역과 흑인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일부 직종에는 취업이 제한되었으며 흑인들의 참정권은 공개적이거나 혹은 암암리에 제한되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약 50년 동안 남부를 떠난 흑인 이주자는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미국 전체 흑인 중 남부에 거주하는 흑인들이 1870년에는 91.5퍼센트, 1910년에는 89퍼센트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후 10년 동안 흑인 이주자의 수는 급격히 증가했는데, 흑인들은 엄격한 법률적 제한, 폭력, 겨우 생존할 만큼의 열악한 경제 상황에 ‘떠밀려’ 이동하게 되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때문에 노동인구가 부족해지면서 북부 산업체들이 남부에서 흑인과 가난한 백인들을 끌어들였다.

    1914년 이전에는 미국은 산업 확장에 필요한 노동력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 수백만 명의 유럽 이주자에 의존해왔다. 1910년 미국 인구의 1/3 이상이 외국 출신이거나, 적어도 부모 중 한 명이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이러한 유럽 이주민 유입이 중단되자 남부의 거대한 노동력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흑인 노동력이 선별적으로 북부로 이동하지 않았다면, 남부의 경제는 흑인 유출로 인해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남부를 떠난 흑인들 대부분은 18세에서 35세 사이였다. 남부에서 성장한 이들이 생애 중 가장 생산적인 시기를 남부 밖에서 보내게 된 셈이다. 남부에 남아 있는 흑인들은 대개 가장 생산적인 시기를 지나고 있거나 퇴직한 상태, 혹은 아직 노동력에 포함되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훈련을 가장 잘 받은 젊은이들 다수가 남부를 떠남에 따라 흑인들이 남부의 전문 직종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 또한 제한되었다.

    남북전쟁에 따른 또다른 결과는 남부 지역 사람들이 느끼고 있던 분리주의가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남부는 미국에서 군대에 의해 점령당했던 유일한 지역이었으며, 1세기 이상이 지나고 경제 성장이 상당히 이루어진 후에야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남북전쟁과 재건시대는 남부 백인들이 서로 통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솔리드 사우스(Solid South)’라는 표현은 당시 남부 전체가 서로 결속하여, 종종 전국적인 경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투표를 했던 추세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남북전쟁과 남부 재건설이 북부 그리고 공화당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남부 백인들은 고집 센 반대파인 민주당원이 되었다. 남부 백인들은 민주당과 이데올로기 면에서 연결점을 찾지 못하면서 매우 분파적인 ‘남부 민주당원’이 되었다. 오늘날 전국적인 정치 변화와 남부 문화의 변화 때문에 남부는 완전한 민주당 지역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비록 대부분이 민주당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남부에서 선출된 정치인들을 보면 다양한 정치 성향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북전쟁의 결과 (미국의 지리, 2004., 미국 국무부 | 주한 미국대사관 공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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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남북전쟁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노예제 존속을 둘러싼 갈등이다. 관세, 자치 제도, 연방제 구조 등등 여러 원인들이 있었으나 전부 근본은 노예제에 얽혀있었고, 남부의 독립과 전쟁은 노예제가 없었으면 일어날 수가 없었다. 특히 관세 어쩌고는 역사적 미국 관세 차트[4]만봐도 알 수 있으니 남북전쟁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이 말을 꺼내면 비웃음을 사기 딱 좋다. 애초에 남부가 그렇게 관세에 민감한 경제구조를 만든 것 자체가 노예제가 원인입니다.

    노예제는 연방 시작부터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노예제는 도덕적으로 '사악한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으며, 미국 독립선언문의 영향으로 인간이 최소한 자유, 생명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사상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6] 문제는 이 사상이 당시 미국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노예제에 정면으로 반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독립하자마자, 노예제의 수익성이 노예제를 유지할만큼 좋지 않았던[7] 북부에서는 노예제 폐지 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바탕으로 뉴저지 주를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북부 주들은 1850년대까지 노예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노예제의 수익성이 더 좋았던 남부주는 상황이 달랐고 이 차이는 '3/5 협정', '20년간 국제 노예무역 허용' 등 각종 타협으로 이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부에서는 꾸준하게 노예제가 폐지되어 갔고, 초창기에는 필수노동의 형태로 노예를 착취해 남부의 개척과 농업경제를 다 만들어낸 이후 그 결과물인 담배 등 상품작물의 수익성이 떨어져 가던 버지니아 등 북쪽의 남부 주들도 슬슬 노예제 폐지로 여론이 기울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덜컥 조면기[8]가 발명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면화는 수요는 많았으나 씨앗 때문에 수확을 해도 대량으로 시장에 내놓을 수가 없었는데 조면기의 발명 이후 이 과정이 수월하게 변함으로써[9] 엄청난 수익률을 보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씨앗을 분리하는데 걸리던 시간이 대폭 줄어듦에 따라 보유한 노예를 모두 목화따기에 몰아넣을 수 있고, 면화는 공급만큼 수요가 창출되던 상품이라 요구하는 목화의 양 또한 크게 늘었고, 여전히 많은 노동력을 요구되었기에 노예제가 존속된다. 흑인 노예의 전형적인 모습인 목화 따는 모습이 이때 가장 흔한 노예의 작업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조면기의 개발자인 일라이 휘트니는 노예제에 부정적이었다.[10] 기술의 발전이 인권의 퇴보를 가져올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하지만 기후조건 때문에 면화 농장은 점점 남서부로 이동하고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조지아가 중심이 되었던[13] 면화 농업은 다시 미시시피와 앨라배마 주로 주도권이 이동했고, 이후에는 루이지애나가 급부상했다. 이 5개 주가 당시 미국 면화 생산량의 3/4 이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미국의 면화 생산량이 당시 세계 면화 생산량의 3/4를 차지했고, 그렇기에 노예제 하의 남부에서도 서쪽으로의 노예제 확장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면화 경작지의 확대를 위해서는 노예제도 역시 그에 따라 확장되어줘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붙잡아 놓고 일을 시킬 수 있는 노동력, 즉 노예는 남부에서 상당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농장들이 서쪽으로 이전해가더라도 역사가 오래된 남부 주(버지니아 등)들에서는 노예를 '생산'하는 사업이 번창하게 되면서 노예제 폐지 이야기는 쏙 들어가게 됩니다.

    두 번째는 노예 가격입니다. 이 시기는 미국 남부를 제외하면 유럽 등 소위 근대화된 국가에서는 노예 무역이 끝장난 시기였다. 미국도 노예 수입은 이미 1808년에 법으로 금지되었기에 플로리다, 텍사스와 멕시코를 통한 불법 수입이 등장하였습니다. 이건 당시 주간 거래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가격 폭등에서 알 수 있듯이 수요를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고, 이후 노예 생산 단계로 접어들어서야 노예 가격 폭등이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남북전쟁 시기까지도 노예 가격은 꾸준히 상승세였습니다.

    이는 노예 수입이 대부분 끊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공급의 급격한 감소와 면화 산업의 발달[14]이 더해지면서, 시장 원리에 따라 노예 가격이 꾸준히 치솟고 있었다. 담배 농업이 무너졌다가 면화 농업이 다시 각광받기 시작한 1800년에서 1850년 사이 노예 가격은 약 50달러에서 800~1,000달러까지 상승했습니다.

    이후 갈수록 노예의 생산력보다 노예 자체의 가치가 좀 더 부각되고 있었다. 1850년대 무렵 노예들의 가치는 당시 기준으로 약 20억 달러 정도였는데, 이건 남부가 소유한 총자본의 약 1/4이며 연방 예산의 10배 정도였다. 면화 작물의 가치도 이것의 1/10 정도밖에는 안 되었다. 이처럼 노예는 비싼 재산이었고, 노예제 폐지는 그 재산을 통째로 증발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싼 노예 가격 때문에 전쟁 직전까지도 남부에서 노예를 거느리던 사람은 백인들 중에서도 플랜테이션 농업을 하던 상위 5% 이상의 대부호들이나 가능한 것이었다. 백인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대다수 중소 자영 농민들은 노예를 부린 적도 부릴 일도 없었으나 오히려 이 하위계층들이야말로 노예제 폐지에 가장 격렬하게 그리고 가장 끝까지 저항한 부류였다. 남북전쟁의 발발 원인에는 경제적 요인도 있었지만 정치적, 가치관적, 생존적 문제가 더 중요했습니다.

    이런 도덕적 논란은 당시 미합중국이 브라질과 스페인령 카리브 섬들을 제외하면 백인 문명권에서 유일하게 노예제를 굴린다는 것 자체가 큰 원인이었다. 초기에는 노예의 필요성에서 시작했을지 몰라도, 이것이 외부의 시선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흑인 노예들의 존재를 통해 자신들의 인종적[16], 문화적 우월성을 만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도덕적인 부분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같이 당대가 배경인 소설들이다. 작중 핀은 친구인 흑인 노예가 도망나왔다가 노예 사냥꾼에게 잡힌 것을 보고 이를 구해야 할 지 갈등하는데, 왜냐하면 도망나온 노예를 고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도덕과 신앙이 주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 멋대로 사는 부랑아지만 최소한의 인륜도덕은 가지고 있는 핀이 고민 끝에 결국 내가 지옥에 가겠다고 굳은 결심을 해야 친구인 도망 노예를 도와줄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 당시 남부의 도덕관이었습니다.

    노예를 가진다는 것 자체로 부유함과 우월함의 상징이 되는 것이 이 시기 남부 백인 사회의 모습이었다. 앤드루 잭슨처럼 가난한 백인 남성이 돈 벌어서 플렌테이션을 사고, 노예를 부리는 것이 이 당시 남부의 '아메리칸 드림'이였다. 게다가 이 시기 미국 남부는 유럽 귀족 사회를 모방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 대부호들은 자신들과 노예를 통해 유럽식 귀족과 평민을 구현했고, 이런 상류층의 문화는 하류층으로 전파되었다. 실제로 남부를 지배하던 대농장 소유주들과 이들과 밀착한 남부교회들은 노예를 부릴 꿈도 못 꾸었던 가난한 백인 자영농들과 빈민들에게[17] 아무리 못나고 가난해도 백인은 깜둥이보다 훨씬 우월하다라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주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남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가난에 시달리던 백인자영농, 빈민들의 분노가 대부호들을 향하지 못하게 막아주는 장치였다. 따라서 북부에서 노예제 폐지론이 득세하자 남부 엘리트들은 이걸 방치하면 자기들의 사회적, 문화적 우위를 완전히 상실한다고 판단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리고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를 주입당했던 남부의 자영농들, 하류층들은 정작 자신들은 지킬 노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북전쟁의 막바지까지 가장 격렬하게 싸웠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가난에 시달리더라도, '그래도 나는 저 깜둥이 노예보단 우월하고 고귀한 백인'이라는 자부심에 기대서 살아왔는데, 노예제가 폐지되면 그게 무너지고 해방된 노예의 자리에 내가 갈지도 모른다라는 공포가 주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들 상당수는 노예를 관리하는 자들로 노예 질서에 예속된 상태인데, 자신이나 깜둥이나 매한가지 대농장주들한테 시달리는 동급의 가난뱅이가 되는 걸 넘어 그 흑인의 자리까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역사학자들은 전쟁 전 남부사회를 단순히 노예가 있는 사회가 아닌, 노예제 자체가 사회 구조의 핵심에 있으며 노예제 없이는 그 사회 자체도 유지될 수 없는 '노예 사회'라고 정의합니다.

    기타 부수적 요인들도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민주당과 공화당&휘그당의 대립 구도도 하나의 요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백인 남성이라면 1인 1표라는 규칙이 노예주들에게는 조금 다르게 적용되었다. 노예는 1명당 3/5표로 계산되었고, 북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남부는 이를 통해 북부를 견제해나갈 수 있었는데 공화당이 노예제를 폐지하여 해방 노예 중 남성에 대한 투표권이 부여되면 공화당 지지 세력이 남부에서 강해지며 민주당의 지역 지지 기반을 잃을 수도 있다는 판단도 존재했다. 실제로 노예제 폐지 후, 해방 노예들의 지지와 표는 공화당으로 향했다.

    미국 정치의 가장 큰 장점은 타협입니다. 건국 초부터, 코네티컷 타협을 통해 상원, 하원의원 배정 등 국가의 기틀이 정해졌다. 건국 직후부터 노예 인구의 3/5을 하원의원 배정에 반영하여 남부의 발언권이 보장되었고, 미국의 확장 과정에서도 미주리 협정, 1850년 타협 등 갈등을 억제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하지만 노예제로 인한 남부와 북부의 갈등은 문제를 빠르게 봉합하려는 정치적 타협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했습니다.

    이처럼 남북전쟁의 배경은 근본적으로 노예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예제로 인한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상황들을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부족합니다.

    출처: 나무위키 남북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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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국은 178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후 남부와 북부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합니다.

    둘은 먹고 사는 방식이 달라 세금에 대한 문제도 생각이 달랐는데, 북부사람들은 관세를 높여 나라안의 제조법을 보호하려했고, 남부는 면화수출을 위해 관세를 낮추길 원했습니다.

    또 노예제도에 대해서는 북부는 흑인들을 강제로 일을 시키는 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나 남부는 농장일을 해야 할 사람이 필요해 노예 제도를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던 중 1861년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링컨이 북부의 지지에 대통령이 되자, 이에 반대하는 남부 일곱개 주가 미국 연방에서 나와 남부 연합이라는 나라를 세우는데 미국 정부는 나라를 남과 북으로 나눌수 없다 생각하던 중 4월 남부 연합이 섬터 요새를 공격하게 됩니다.

    섬터요새는 남부 연합의 땅이었지만 연방군이 차지하고 있던 곳으로 이에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남부는 북부보다 전쟁 물자나 군인 수가 부족했지만 면화를 팔아 부유했고 길도 잘 뚫려있어 승리할거라 믿었고, 남군을 이끄는 리 장군은 뛰어난 전략으로 불리한 조건에도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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