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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올인
리플올인22.12.08

6.25때 북한이 남침 했잖아요? 그때 쳐들어 올거라는 징조 같은게 없었을까요?

북한이 쳐들어온다는 징조나 조짐 같은걸 못느낀 건가요? 첩보병이나 간첩등 아무런 정보를 받지 못한건가요?? 궁금하네요 우리가 징조나 조짐같은걸 알고 있었어도 어느정도 초기에 방어는 조금이라도 할수있었을거 같은데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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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는 북한이 기습적으로 쳐들어와서 6.25가 발발했다고만 배웠습니다.

    그러나 징조나 조짐은 왜 없었을까요,

    이형근 장군은 6.25 전후에 한국군 내부에 북한과 동조한 간첩이나 세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예민한 부분임으로 구글링 해서 찾아 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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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38도선을 경계로 분단된 이후에 북한은 소련에 의한 계획적인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여 1948년 10월에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이미 완전 무장한 4개 보병사단과 소련제 T-34 중형전차로 장비한 제105 기갑대대를 편성하였다.
    1949년 3월 17일에는 소련과 북한 간에 조소군사비밀협정이 체결되고, 또 3월 18일에는 중공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중국 공산군에 있던 조선군 2만 5000명이 북한에 인도되었다. 이로써 10개 북한군 사단 13만 명이 38선에 배치되었고, 10만 명의 예비군까지 후방에 조직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전쟁(韓國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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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남한에서는 북한이 쳐들어 올것이라는 징조가 있었지만 그러한 정보를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않았다고하며 그 징조는 북한군의 대규모 병력과 무기의 이동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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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맞습니다. 그런 징후가 있었다고 하네여. 1949년 전후 잦은 삼팔선 충돌로 인한 준 전시상황에서 남침 정보를 소홀히 취급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25일 당일 상황만 보아도 대응에 너무 안이했구요.. 전쟁 발발 사실이 국방부장관에게 보고되기까지 3시간, 대통령에게 보고되기까지는 무려 6시간이 걸렸다고 하지요. 전화가 있었던 시대에.이건 아닌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24일 저녁 육군 장교클럽 낙성식 댄스파티 술자리가 길어져 새벽 2시에 귀가했다는 채병덕(蔡秉德) 총참모장은 새벽 5시 육본상황실 당직근무자 김종필(金鍾泌ㆍ총리 역임) 중위의 보고를 받고 전군 비상조치를 내렸고 비상시국 핵심보직인 육본 작전국장 장창국(張昌國) 대령은 이사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전화연락이 안 되었다고 하지요. 채 총장은 보고를 받고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 집에 전화부터 걸었는데 전화를 받지 않자 장관 비서에게 연락해 함께 지프를 타고 집으로 달려갔다. 오전 7시정도 였다고 합니다. 아침부터 비원에서 낚시를 즐기던 이승만 대통령은 오전 10시쯤 경찰 보고를 받고 경무대로 돌아왔는데, 이때야 신 장관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그는 간략한 상황보고 끝에 “크게 걱정하실 것 없다”는 말을 거듭했다고 하네여. 너무나도 안이하게 초기대응을 했던 것도 비극을 더욱 키웠던 원이 된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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