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푸른재규어247
푸른재규어24723.05.21

5.18 민주화 항쟁은 왜 일어났나요?

안녕하세요? 오랫만에 광주에 갔더니 5월이라는 포스터를 봤습니다. 5.18민주화 항쟁에 대한 이야기더라구요~ 그런데 민주화 항쟁은 왜 일어 났나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1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다. 유신헌법을 개정하고 민주적인 헌법으로 되돌아야 한다는 움직임 속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11월 7일에 긴급조치를 해제해 긴급조치에 의해 금지됐던 개헌 논의를 허용했다. 하지만 12월 12일에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 정승화(육군 참모총장)를 체포해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국민들의 민주 정권 수립 요구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두환은 1980년 2월에 보안사령부에 지시를 내려 K-공작계획을 실행해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해 나가고 있었다.

    1980년 5월에 초순경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로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15]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설치해 신군부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탄압하면서 신군부가 정국을 주도하고, 국회 폐쇄와 정치인 체포로 신군부의 안정적인 정국 장악을 담보한다는 것이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한 의도였다.

    중앙정보부는 일본 내각조사실의 첩보를 토대로 5월 10일에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5월 11일에 '북괴남침설'과 같은 첩보는 가치가 없다고 결론 내린 상황이었다.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은 5월 13일에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해 흘린 구실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같은 날에 미국은 '북괴남침설'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입수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16] 훗날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반장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라고 밝혀 신군부가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악용했던 '북괴남침설'은 신군부로 말미암아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17]

    한편 같은해 5월 중순부터 정부와 국회에서는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고 있었다. 5월 12일에 신민당과 공화당 양당 총무들은 개헌안을 접수하였고, 비상계엄 해제 등의 정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5월 20일 10시 임시국회의 소집을 공고했다.[18] 같은날 신현확 총리는 국회와 협의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개헌 일정을 앞당긴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19]

    1980년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의 정치 관여를 반대하기 위해,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고, 5월 15일 시위대 대열 속에 속했던 청년 한 명이 버스를 탈취하여 저지선을 돌파, 전경에 돌진하여 전경 이성재 일경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20]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에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려 18일 1시 자로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신군부는 같은 날 새벽 2시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해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 26명은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됐고, 2,600여 명의 학생·교수·재야인사 등이 체포됐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무장헌병들에게 가택 연금됐다. 신군부가 이날 내린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정치 활동 금지·휴교령 등의 민주주의 역행 조치에 항의해,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에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했고,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구타·폭행으로 진압했다. 과격한 공수부대의 투입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공수부대의 투입에는 향토 사단장 정웅의 개입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정웅은 광주법정에서까지 부정을 하지만, 투입됐던 진압군의 증언에 의하면 정웅은 시위대의 강경진압/해산/전원체포를 주문한다.

    출처: 위키백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


  • 1.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시해사건이 발생함으로써 국내 정세는 극도로 불안정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2. 과도정부가 들어서고 차기 정부 선거를 위한 개헌정국을 꾸려 가고 있던 최규하 정부를 향해 1980년 5월19일까지 총리퇴진을 요구하는 한 편 5월22일에는 최규하 정부를 전복시키겠다는 김대중과 범운동권의 총궐기 앞에 최규하 정부는 이미 이행되고 있었던 비상계엄을 1980년 5월18일 0시를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 비상계엄령으로 대치하고 김대중 등 운동권 인사들을 체포 구금하게 된다.



    3. 광주 운동권은 이를 빌미로 더욱 과격한 폭력 시위를 부추기게 되고 광주에서 총기무장 폭동 사태로 변질되어 5월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의 5.18폭동반란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