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해결사1
해결사123.08.08

왜 합스부르크왕가는 근친결혼을 고집했나요?

합스부르크왕가는 근친결혼을 고집했고 그 결과 근친결혼으로 인해 매우 허약한 자녀들만 태어나 일찍 죽으므로 결국 대가 끊어지게 되었다는데 왜그렇게 근친결혼만 고집했나요?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
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합스부르크가는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가 되기 위해 문서까지 위조해서 귀족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가문의 위대함을 증명하고자 오스트리아 지역의 빈을 문화의 도시로 육성시켰고, 슈테판대성당과 빈대학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많은 음악가들의 활동무대가 됩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다른 가문들과 결혼정책을 펼쳤고, 심지어는 황제의 외동딸인 엘리자베트와 결혼하여 130년만에 황제가문으로 상승했고, 영토도 가지게 됩니다.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1세는 부르타뉴 가문의 안과 결혼했고,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와 자신의 딸 마르게리따를 결혼시킵니다. 그러나 부르타뉴 영토를 차지한 막시밀리안 1세에게 불만을 가진 샤를 8세가 자신의 결혼을 무효화 시키고 무력으로 부르타뉴를 다시 차지하고 자신의 장모 겪이었던 안과 결혼하면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은 숙적이 됩니다.

    이에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합스부르크가는 스페인 왕가와 사돈을 맺었으나 스페인의 상속자들이 모두 사망하고 결국 합스부르크가의 수장인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 국왕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헝가리 왕가와도 사돈을 맺었는데 헝가리 왕이 전쟁에서 전사하자 헝가리 지역도 차지하게 됩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반합스부르크의 성향이 강했기에 합스부르크가에서 차지하고 있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그 사이는 프랑스임)를 다스리기에 어려움을 느꼈고, 카톨릭인 스페인은 이교도와 개신교와의 결혼은 금지하고 있었기에 영토를 지키기 위해 혈통이 중요하다는 의식이 박히면서 궁극적으로 근친혼을 선택하게 됩니다.

    근친혼에 의해 태어난 자식 중 돈카를로스는 지금에 와서 말하는 취약X증후군이라는 유전적 질환을 가졌는데 주걱턱, 짝다리, 정신질환을 자겼었고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후 필리페 4세 국왕은 여동생의 딸과 결혼하는 등 근친혼을 이어갔고, 그의 딸 마르가리따는 외삼촌인 레오폴트 1세와 정혼합니다. 그녀도 자랄수록 주걱턱이 심해지고 21세에 사망하게 되었고, 그의 남동생 카를로스 2세도 38세에 사망하였습니다.

    후대에 조사해보니 근친혼일 시 나타나는 유전병에 의해서 스페인 왕실의 자녀 34명 중 50%가 10살 이전에 사망하였으며, 근친혼에 의해 유전병으로 주걱턱 등이 나타날 확률이 높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10여년간 이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끝에 결국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합스부르크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략결혼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인 로드링겐 가문의 공작 프란츠 1세와 결혼하면서 근친혼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슬라브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한 이유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마지막 황제인 카를 1세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국외로 추방당하게 되면서 전쟁에서 패한 합스부르크 제국은 마침내 종지부를 찢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0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양의 귀족들 사이에서 가문의 명맥을 잇기 위해 근친혼이 성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근친혼을 통해 명문을 유지하려던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바로 그러한 정략 때문에 무시무시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명문 가문의 유전자가 세월과 함께 병들기 시작했고 후손들은 이를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근친혼으로 명맥을 이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병약해서 빨리 죽었고 유아 사망률도 매우 높았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각종 질병과 영양실조에 노출돼 있는 보통 스페인 어린이들 가운데 20%가 10세 전 사망한 데 비해, 합스부르크가 어린이들은 좋은 환경 속에서도 절반 가량이 10세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결국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200년 만에 카를로스(Charles) 2세의 죽음과 함께 맥이 끊겼습니다. 이후 피 비린내 나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고, 결국 브르봉 왕가로 바통이 넘어갔다는 이야기는 이미 설명한 내용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가문과의 근친결혼이 순수한 혈통을 지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유지한다고 믿었다고 하네요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많은 왕족들과 귀족들 사이에서 순수 혈통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근친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