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가장 처음 마시기 시작한 것은 언제 어느 나라인가요?
커피는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먼저 마셨습니다. 9세기 에티오피아의 카파 지역에서 커피 나무 열매가 염소 목동 칼디 전설로 알려졌습니다. 염소들이 붉은 커피 체리를 먹고 밤새 흥분하며 뛰노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에 먹어보니 각성 효과를 느꼈다고 합니다.그리고 11세기 경 예멘 수피 수도사들이 피로를 풀기 위해 볶은 원두를 물에 섞어 마시기 시작했으며, 15세기 모카 항구에서 재배 수출되기 시작하여 '아라바아의 와인'으로 불리며 이슬람권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1980년에 설치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무엇인가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1980년 5월 31일 신군부가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만든 초헌법적인 기구입니다. 국가 안보 강화와 경제 안정 및 부패 척결을 했으나 전두환을 상임위원장으로 한 신군부의 권력 기구입니다.주요 역할은 주요 정치인의 정치 활동 규제, 언론 통폐합, 삼청교육대 운영 등을 주도했습니다. 이 기구는 헌법, 법률을 초월한 독재 발판으로 민주화 운동 탄압의 핵심 기구였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궁녀들은 궁녀가 된 순간부터 궁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었나요?
조선시대 궁녀들은 입궁을 하면 궁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궁녀는 보통 8~13살에 '생각시'로 선발되어 입궁합니다. 관리들이 지방을 순회하며 외모, 재능, 가문 등을 보고 강제 선발한 것입니다. 정식 궁녀가 되면 내명부에 소속되어 품계를 받았으며, 역할이 부여되었습니다. 이들은 평생 궁에 머물렀으며, 나이가 들거나 병들거나 국가 재난시나 출궁이 허용되었습니다.하지만 승은을 받아 후궁이 되거나 결혼을 허가 받는 경우, 재난과 전란시 대량 출궁하기도 합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성경에 나오는 장수한 사람들의 실제 나이는?
성경 구약 창세기에 기록된 오래 산 사람들의 나이는 900 이상입니다. 창세기 5장에 따르면 노아 홍수 이전의 인물 가운데, 므두셀라 969세, 야렛 962세, 노아 950세, 아담도 930세까지 살았습니다. 과학적으로 900세 수명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 달력이 오늘날의 달력과 다르다면 이해가 됩니다. 예를 들어 1년을 1달로 사용했다면, 므두셀라는 78세 정도 살았다고 추정합니다. 그리고 수명을 과장하였다는 것은 상징적, 신학적 의미로 해석됩니다.
5.0 (1)
응원하기
조선백자와 유교사상이 연관성이 있나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는 백자입니다. 그리고 백자는 조선의 유교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들은 성리학적 유교를 사정적 배경으로 하였습니다. 유교는 겸손, 절제, 내면의 덕을 중시하는데, 이는 백자의 순백 색상과 최소한의 장식에 반영되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이 대가야가 가야를 대표하는 것을 알게해준다는데 어떤 부분 때문인가요?
고령은 대가야의 중심지로 후기 가야 연맹를 이끌었습니다. 지산동 고분은 700여기가 산자락에 집중 배치되어 있으며, 가야 최대 규모로 왕족 및 수장층 무덤으로 추정합니다. 특히 순장곽의 존재로 권력 집중과 위계 구조가 확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금동관의 출토와 야광조개국자, 금동합 유물을 통해 주변 가야국으로부터 공납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대가야는 당시 가야 연맹의 맹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임시 정부가 개화파와 창조파로 나뉜 이유가 무엇인가요?
1923년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그 동안의 독립 운동을 반성하고, 향후 독립 투쟁의 방략과 임시정부의 방향을 놓고 토론하였습니다. 특히 애초에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둔 것이 외교 투쟁에 무게를 두었지만 그 성과가 미흡하고, 외교 투쟁을 주도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국제연맹위임통치 청원에 대한 비판으로 새로운 투쟁 방략이 필요했습니다.이에 신채호 등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한 인사들은 무장 투쟁에 용이한 곳에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창조론, 하지만 안창호 등은 외교투쟁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며,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하며 개조론을 주장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평가
응원하기
조선시대 왕궁에도 휴일이란 개념이 있었나요?
조선시대 왕실에서도 휴일 개념이 존재했습니다. '순휴일'라 하여 매월 상, 중, 하순에 하루씩 쉬었으며, 설날과 추석, 단오 등 명절에도 휴무였습니다 . 그리고 궁녀와 내관들은 격일제 근무를 하였으며, 순휴일 이외에도 부모상, 출산 등일 경우에는 특별 휴가를 제공했습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
꽃게의 명칭관련 궁금해서 질문 올립니다.
'꽃게'는 꽃모양과 직접 관련이 없고 등딱지의 뾰족한 돌기가 '곶' 모양과 닮아서 곶게라 했습니다. '곶'은 꼬챙이처럼 뾰족한 모야을 말하며, 육지의 돌출부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포항의 '호미곶'의 '곶'에 해당됩니다. 이것이 변형되어 꽃게가 된 것입니다. 즉 원래 이름은 '곶게'였습니다.
4.0 (1)
응원하기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합의하여 선포한 배경은 무엇인가요?
1969년 닉슨독트린 선언으로 냉전이 완화되면서 박정희 정부의 반공 이데올르기에 위기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심화된 냉전 체제는 소련을 중심으로한 공산진영과 미국을 중심으로한 자유진영의 대립을 야기했으며,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도 국민 통합과 권력 장악에 활용했습니다. 하지만 닉슨독트린과 닉슨의 중국 방문과 주한미군 감축 등은 남한은 물론 북한에게도 불안감을 심어주었습니다.이에 남북한은 모두 통일 이슈를 통해 각자의 권력 유지 및 강화려는 것입니다. 1972년 남한의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북한 방문과 북한 박성철 부수상의 서울 방문으로 7.4 남북 공동 성명을 합의하여 선포한 것입니다. 남북한은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을 바탕으로 통일을 지향하자고 약속하고, 이를 위해 남북조절위원회를 설치했으나 양측 모두 독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했을 뿐입니다.
채택 받은 답변
5.0 (1)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