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던 엄흥도가 궁금해요
단종은 1457년 세조에 의해 사사되었으며, 시신은 버려졌다고 합니다. 게다가 세조는 이를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고 엄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영월 호장 엄흥도는 아들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영월 엄씨 선산(동을지산)에 암장했다고 합니다. 엄흥도는 처벌을 피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은거 생활을 하였으며, 후손들은 단종의 영정을 모시며 은밀히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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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세가 갈수록 각자 도생의 시대가 되어 가고 있는데요 앞으로 다시 화합의 장이 펼쳐질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20세기 초 1,2차 대전을 경험을 통해 세계는 국제연합을 설립하고 평화를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부상과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가 약화, 유엔의 역할 축소 등으로 국지전, 테러 등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전세계 여러나라들이 힘을 통해 국가간 문제를 해결하는 시대 흐름이 국제 질서를 더욱 어렵게 합니다. 게다가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중간 선거를 앞두고 있어 지지 기반을 늘리기 위해 이란 공격을 감행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장기적인 충돌은 이란은 물론이고 미국에게도 부담이 크기 때문에 장기전는 제한 될 것으로 보입니다.그러나 최근 국제 질서가 힘에 의한 문제 해결 방법이 대세가 되는 분위기가 일반화되고 있기 때문에, 평화보다는 힘의 원리의 지배가 확대될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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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어록에 관해 질문드립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된 상황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역사를 통해 애국심을 불러일으켜 한다는 취지로 민족주의 사학을 정립하였습니다. 특히 1908년 <독사신론>에서 선생은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선생은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그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 것'라는 표현을 기술했습니다.그리고 국권 피탈 이후에도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하여 민족의식을 통해 왜곡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독립을 달성할 수있다고 보고, 한국사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이상과 같이 선생은 역사를 통해 민족의식을 강화하고, 결국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비록 직접적으로 '역사를 잃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라는 문구는 기술하지 않았지만 2000년대 예능과 언론 등에서 유사한 문구로 인용, 또는 사용되면서 선생의 어록이라 인식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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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했던 이유가 뭔가요?
흥선대원군은 1863년 고종의 즉위와 함께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는 집권 직후 국내적으로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왕권을 안정시키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하였으며, 대외적으로 통상수호거부 정책을 통해 제국주의 침략을 막으려 했습니다.흥선대원군은 처음에는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통해 해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동맹이 뜻대로 되지 않자 오히려 병인박해를 일으켰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의 병인양요를 목격했습니다. 게다가 제너럴셔먼호 사건와 신미양요, 오페르트 도굴 사건을 겪으면서 서양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저항 의지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의지는 1873년 전국적으로 세운 척화비에서도 엿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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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무당은 조상이든 신이든 뭔가 알려주는건가요??
무당은 신내림을 통해 조상신과 메시지를 주고 받는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과학적 증거는 없습니다. 무당은 '신병'이라는 환청, 환각, 고통 증상을 신이나 조상의 내림으로 해석하며, 내림굿을 통해 치유될 수 있으며, 이후 신접으로 미래나 길흉을 전합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신병을 해리 장애, 조현병 유사 증상, 또는 히스테리 반응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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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전날 왜 밥을 많이먹는 풍습이 생겼나요,
정월 대보름 전날인 음력 1월 14일 밥을 여러번 먹는 풍습을 '백가반'이라 합니다. 하루에 아홉번 이상 오곡밥을 먹어야 부지런함과 풍년이 온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농번기 대비 체력 보강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정월 대보름 오곡밥을 이웃집에서 몰래 훔쳐 먹으며 나누는 '보름달 훔쳐 먹기'도 있습니다. 이는 겨울철 식량이 귀했던 시절 서로 나누며 영양 보충과 공동체 유대를 강화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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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는 어쩌다가 부관참시를 당했나요?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으로 국왕에 즉위한 정난 공신이며, 예종과 성종의 장인으로 당대 최대의 권력가였습니다.하지만 연산군 생모 윤씨가 성종 10년에 폐출된 사실을 것을 알게되면서 이미 죽은 한명회도 윤씨 사사에 찬성하거나 방관한 자로 지목된 것입니다. 따라서 1504년 갑자사화 때 한명회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를 감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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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의 중심도로가 테헤란로인 이유가 무엇인가요 ?
서울의 강남 중심도로인 테헤란로는 서울시가 1977년 6월 테헤란과 자매결연을 맺은 결과입니다. 테헤란 시장이 '우의를 상징해 서로의 도시 이름으로 길을 짖자'고 제안하여 강남의 중심로가 테헤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테헤란 북부 바나크 지역에서도 '서울로'가 생기고 '서울공원'이 조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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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 회담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얄타회담은 2차 대전 말기인 1945년 2월 소련의 얄타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들이 모여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 대해 논의한 회담입니다. 미국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만주, 사할린 등 영토 이권을 인정하는 것을 약속했는데, 한반도에 대한 이권 분할도 논의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한반도에서 대한 명시적 결정은 없지만 사실상 소련을 설득하기 위해 한반도 진출을 허용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7월 포츠담 회담으로 이를 재확인하였습니다. 결국 8월 원폭 투하 이후 소련의 남진과 38도선 이북 분할 점령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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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이 조선중립화를 주장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유길준은 1885년 조선 중립화론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대결이 심각해졌기 때문이니다. 즉 갑신정변 이후 청의 간섭이 노골화되고, 일본의 침략적 야심이 드러났으며, 러시아는 연해주를 점령한 이후 남하 정책을 지속하였습니다. 또한 영국은 1885년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햐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즉, 열강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중립국으로 표방하여 자주독립을 유지하자는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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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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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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