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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대길,건양다경 이거 집앞에 적어놓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입춘대길 건양다경은 봄이 시작되었으니 크게 길하고 경사가 많이 생기기를 기원한다는 것으로 집앞, 문앞에 적거나 붙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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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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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해적은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바다민족은 고대 이집트 나일강 하구에서 징세관이 탄 배를 습격한 이들이 기록에 남은 가장 오래된 해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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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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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산음료 환타의 유래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코카콜라에서 발매된 과일맛 탄산음료의 총칭으로 독일에서 개발했으며 1940년 출시되었습니다.환타는 나치 독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음료이며 1939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시 대공황으로 인해 경기가 매우 나빴습니다. 실업자 구제 정책 중 하나로 공장의 건설을 많이 추진했는데, 그 중 하나가 미국의 코카콜라 생산 시설입니다.미국에서 수입되던 코카콜라 시럽의 수입이 중단되어 독일의 코카콜라 공장은 가동 중단된 상태였는데 당시 독일 코카콜라 지사장이었던 막스 카이트는 중립국인 스위스를 통해 들여오려 하나 불가능하였고, 결국 독자적으로 콜라를 대체할수있는 새로운 음료를 개발하기로 합니다.새로운 음료의 환타라는 이름은 Fantasie라는 독일어에서 따왔고 당시 카이트가 직원들에게 새 음료의 이름을 공모하기 위해 회의를 개최했는데 아이디어들이 좋지 않아 답답한 카이트는 상상력을 발휘하라고 소리치자 한 직원이 환타라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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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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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님이 어떻게 사망했는지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유관순은 1920년 9월 28일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향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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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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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대보름에 대한 역사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정월대보름은 한국의 전통명절로 음력 1월 15일입니다.정월대보름의 기원과 관련된 전설 중 사금갑이 있습니다. 원전은 삼국유사 기이 제1편 소지왕 이야기 입니다.신라시대 임금 소지왕이 정월대보름에 천천정으로 행차하기 위해 궁을 나섰는데 갑자기 까마귀와 쥐가 시끄럽게 울었다, 그리고는 쥐가 사람의 말로 왕에게 말했다.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따라가 보옵소서"그러자 임금은 신하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하고 신하가 까마귀를 어느정도 따라가다가 어느 연못에 다다랐을때 돼지 두마리가 싸움을 하고 있었다.신하는 돼지 싸움을 보다가 그만 까마귀를 놓쳐버렸고 잠시 후 연못에서 노인이 나와 신하에게 편지 봉투를 주고 :그 봉투 안의 글을 읽으면 두사람이 죽을 것이요, 읽지않으면 한사람이 죽을 것입니다. 라고 하고 사라졌다. 신하는 궁에 돌아와 임금에게 편지봉투를 주면서 노인이 한말을 전했다.임금은 두사람이 죽는 것보단 한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편지를 읽지 않으려했는데 옆에 있던 일관이 "전하, 두사람이라 함은 보통 사람을 말하고 한사람이라 함은 전하를 말하는 것이니 편지의 글을 읽으소서"라 했다.일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임금은 편지를 꺼내 읽어보았다. 그 편지에는 "사금갑: 거문고 갑을 쏘시오" 라고 쓰여있었다임금은 곧 거문고 갑을 활로 쏜 다음 열어보니 두 사람이 활에 맞아 죽어있었다. 이 두사람은 왕비와 어떤 중이었는데 중이 왕비와 한통속이 되어 임금을 해치려던 것이다.그 뒤 정월대보름을 오기일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생겼고 이 찰밥이 발전해 약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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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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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으로 벌어진 전쟁 및 결과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통상수교거부정책은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문호를 닫고 서양과 통상하지 않았던 대외정책입니다.18세기 유럽의 산업혁명 이후 서양의 이양선이 조선 연해에 자주 출몰하였고 이들이 통상을 요구하면 해금정책에 따라 그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으나, 조난된 선원 등에게는 먼곳에서 온 사람들에게 최대한 관용을 베푼다는 유원지의 원칙으로 처리하였습니다.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공격으로 베이징이 함락되고 청나라 함풍제가 피난 간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선의조야에서 위기감이 확산되고, 영국, 프랑스와 청나라의 강화를 중재한 러시아가 그 대가로 연해주를 얻으며 조선은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됩니다.이 무렵에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위협을 막고자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려하나 교섭은 성사되지 않고 러시아의 국경 침범과 통상 요청이 기우였다는 것이 드러나고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탄압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천주교를 금지해야 한다는 대신들과 유생들의 주장이 이어지자 대원군은 천주교와 자신의 무관함을 과시하듯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합니다.대원군은 병인박해를 계기로 발생한 병인양요를 물리치고 바다의 관문을 크게 지킬것이며, 외국배는 삼가 통과할수 없다 라는 비석을 덕진돈대 앞에 세워 폐관자수의 의지를 내외에 선포합니다.1868년 발생한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은 서양인에 대한 반감을 더욱 부추겼고, 1871년에는 1866년 발생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전쟁을 했습니다.신민양요 이후 대원군은 서양의 배에서 나는 연기와먼지가 온 천하를 뒤덮어도 동방국의 광채는 의연하게 영원토록 빛나누나 라는 시를 짓고 양이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 라는 척화비를 경향 각지에 세워 서양을 배척하는 정책을 더 강화했습니다.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은 서양 열강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할수는 있었으나 변화하는 세계 정세에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고, 신미양요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는 승리일수 있으나 군사적으로는 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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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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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라 묘호가 붙은 이유를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군은 폐위된 왕, 종묘에 들지 못한 왕을 말합니다.폭정으로 폐위되었던 연산군과 광해군이 이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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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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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당시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한 운동들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29년 조선일보는 문자보급 운동을 전개하여 방학 동안 고향에 가는 중등 이상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전국 각지에서 한글을 가르치게했고, 1931년 동아일보는 제1회 학생하기브나로드운동-남녀학생 총동원, 휴가는 봉사적으로 라는 슬로건으로 문맹퇴치 운동을 했고, 1931~98934년 까지 동아일보는 한글공부, 한국맞춤법통일안, 신철자편람등의 한글 교재 210만부를 배포하며 총 10만 여명에게 한글을 강습하고, 문맹타파가를 보급했습니다.1931년 조선어학회도 우리말 교재를 만들어 보급하고 조선어강습회를 열며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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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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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이후 망명된 빌헬름 2세는 어떻게 살았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본래 승전국들은 제1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책임을 물어 빌헬름 2세를 처형할 생각이었느나 네덜란드 정부는 이를 거부했고 대신 이후 정치활동을 일절 금하겠다는 빌헬름 2세의 약속을 받아냅니다.덕분에 대부분의 재산을 보전할수 있었고 이재산으로 빌헬름 2세는 위트레흐트 인근에 해자와 29개 방이 딸린 도른 하우스라는 저택을 60만 휠더에 구입, 독일에 있는 자신의 옛 황궁에서 가구와, 책, 제복, 값나가는 예술품,유물들을 58대의 화물차에 실어 도른 하우스로 옮기고 50명의 시종들이 묵을 숙소로 건물을 한동 더 짓는 등 네덜란드에서 23년간 유유자적하게 살았습니다.2차세계대전 후 1945년 5월 네덜란드 정부는 빌헬름 2세의 도른 하우스를 몰수하고 호엔촐레른 가문은 도른 하우스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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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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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발행한 당백전은 그 당시 경제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66년 11월에 당백전을 발행하여 6개월간 유통합니다.당백전의 명목상의 가치는 상평통보의 100배에 해당했지만 소재 가치는 상평통보의 5~6배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단순히 화폐 가치만 볼 경우 조선 정부는 당백전 1냥을 제조할때마다 상평통보에 비해 18배의 이득을 봅니다.당대 유통되던 상평통보의 총액은 약 1천만냥으로 추정되며 이때 풀린 당백전의 총액은 적어도 공식적으로 1600만냥 정도였습니다.실물경제는 그대로인 상황에서 화폐가 불어나 전국적으로 그 이득을 훨씬 상회하는 큰 손해가 벌어집니다.화폐의 가치가 날이 갈수록 떨어져 백성들은 물가가 수직상승하여 생활고에 시달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이 조정에서는 화폐의 건전성을 회복하여 막대한 자본과 당백전을 보증할수 있는 귀금속을 마련해야 했으나 조선에서 운산금광 말고는 활성화가 안되는 시점에서 이를 제지할 추가적인 재원확보는 조선에 있어서 더 받아들일수 없었습니다.조선 경제는 통화정책 실패로 인한 화폐의 신뢰도 하락으로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의 반복으로 경제 붕괴가 되고, 위조화폐 또한 기승을 부렸으며, 조정에서 대놓고 공식적인 편법으로 세금을 걷기 위한 꼼수로 당백전 유통을 활성화하고 이는 당백전의 공신력을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이에 경제상황이 악화되고 백성들의 불만만 늘어나니 흥성대원군 조차 어쩔수없어 1867년 4월 주조를 중단, 회수를 시작하고 그 다음해에는 유통이 금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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