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는 왜 한국만 있는 제도 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닙니다. 전세 제도는 전 세계에 총 3개국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인도, 볼리비아인데여. 우리나라 전세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여. 당시 부산, 인천, 원산 등 3개 항구 개항과 일본인 거류지 조성, 농촌인구의 이동 등으로 서울의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어쩔 수 없이 전세제도가 활성화 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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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언어는 몇가지가 되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결론만 말하면 정답은 없다는 것 입니다.전 세계에 존재하는 언어는 약 약 5,000 ~ 7,000개 정도로 추정되기는 합니다만, 공신력 있는 언어 전문 연구기관 들에서도 제 각각 수치를 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걸까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 하나의 언어인지, 어느 말들이 서로 다른 언어 인지를 정하는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기준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상호 의사소통 가능성이 있습니다. 간단하고 명료하죠. 서로 대화를 시도해서,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다면 같은 언어, 알아듣지 못하면 다른 언어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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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은 어떻게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만과 우리나라는 역사가 비슷합니다. 2차대전후에 중국에는 마오쩌뚱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당과 장개석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주이이 국민당이 내전을 벌입니다. 이에 안타깝게도 중국 국민당이 패배하고 쫕겨나와서 현재의 대만 섬에 외서 차린 나라가 대만(Taiwan)입니다. 중국입장에서는 원래 자기들과 같은 민족이였으니까 통일을 하자는 입장이고 다만 대만은 공산주의 체제의 중국과 같은 나라가 될수 없고 독립을 해서 따로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미국 입장에서도 대만이 자신들 무기를 연간 수천억 달러씩 사주는 큰 고객 이다 보니 포기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양측이 대립하고 있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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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가 찾아오면 복이 온다는 말은 어디에서 유래됐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까치는 까마귀과의 조류로 잡식성이며 나무의 해충을 잡아먹는 좋은 동물이기도 합니다.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까치는 귀한 손님의 출현을 알리거나 행운을 상징하는 길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까치의 출현이 그 자체로 행운과 귀한 손님을 상징하는 의미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특히 연초에 까치만 보면 많은 사람들이 설레임을 갖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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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학교는 왜 없어진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민 학교이라는 용어는 일제시대부터 일본인 들이 자주 쓰던 단어입니다. 그이전에는 보통 학교 소학교라고도 불리었지요. 1996년 3월1일 삼일절을 기념해 국민학교 하는 용어를 안쓰고 초등학교라는 용어를 쓰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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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미카제 공격은 어떻게 생기게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풍'이라는 말은 '(일본을 지켜 주는) 신의 바람', '신이 일으킨 바람'이라는 뜻으로, 1274년 원나라 쿠빌라이칸이 주도한 몽골-고려 연합군에서 이들이 바다를 건너오던 중 두 차례나 태풍을 만나 좌절한 것을 두고 "신령이 일본에 가호를 내려 준 것"이라 생각하여 '신풍(가미가재)'이라 이름 붙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2차 대전때는 가미가재 특공대를 조직해 일본이 비행기로 하와이를 폭격할 떄 바로 전투기 이름을 가미갖 특공대 라고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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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를 지은 이와 지은 목적이 뭔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용비어천가는 왕권의 정통성을 강화함으로써 백성의 복속을 유도하고자 만든 대표적인 송축가였다고 합니다. 이 작업을 위해 당대 일류의 유학자들이 집결해 온갖 종류의 사서와 경전을 뒤져 하나의 모범적 사례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은 1945년 정인지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에게 『용비어천가』를 편찬하도록 하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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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왕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2014년 12월 13일 뉴욕 롱아일랜드 자택에서 대한제국 광무태황제(고종)의 다섯째 왕자 이강(1877~1955) 의친왕의 아홉 번째 왕자인 이갑(1938~2014) 황손께서 훙서(薨逝)하셨다고 합니다. 그의 호는 정강재(正康齋)로 본명은 이충길(李忠吉)이며 생존하는 의친왕계 및 대한황실 후손 중에서 장자(長者)가 되신다고 하네요. 그러나 대한제국이 주권을 잃은 후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출생하시어 황실구성원으로서의 적절한 대우는 고사하고 한국 외국어대 영어과 졸업 후 도미 하여 무역업에 종사하시며 평생 평민 같은 삶을 사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에 이르기 까지 대한황실이 복원되지 않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국민들과 함께 몸소 겪으신 역사의 산증인이 되십니다. 아직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정에는 나라를 수치스럽게 일본에 내어준 이씨 조선의 황제들의 후손을 추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가 봅니다. 그분들은 하나 둘 씩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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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세도정치가 펼쳐진 원인은 어디에 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격적인 외척 세력에 의한 세도 정치는 순조 때의 외척 김조순 일문에 의한 안동 김씨의 세도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순조 다음 헌종 때에는 안동 김씨의 세도를 꺾고 풍양 조씨가 세도를 잡았고, 다음 철종 때에 와서는 다시 안동 김씨가 들어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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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유배지를 갈 때 어떻게 갔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배형은 죄의 경중에 따라 2,000리, 2,500리, 3,000리 등 거리에 따라 3등급으로 구분하는데, 이는 단독으로 집행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장형(杖刑)을 수반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배형의 거리 규정이 『대명률(大明律)』 규정에 따른 것인데, 조선의 지리적 조건과 맞지 않아 시행 초 혼선을 일으키기도 하였다고 하는데요. 때문에 1430년(세종 12) 조선의 실정에 따라 각각 600리, 750리, 900리 등으로 유배 거리가 조정되기도 하였다지요. 그러나 3,000리 형이 원칙대로 적용되어 전국을 순회하거나, 여러 고을을 옮겨 총 거리를 합산해 채우기도 하였습니다. 예컨대 1776년(정조 1) 정조는 불경한 상소로 그의 심기를 건드린 김약행에게 사형을 감해서 유(流) 3,000리를 언도해 기장현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3,000리를 채우라는 정조의 특명에 의금부는 서울→기장현(970리)→강원도 평해(400리)→함경도 안변(940)→단천부(690리) 등으로 3,000리가 정확히 반영된 코스를 정한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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