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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의 덮개는 나무였다는데 그럼 철갑선이 아닌거 아닌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주장은 꾸준히 제기됐는데요. 도쿠토미 이이치로(1863~1975)를 비롯한 20세기 초반의 일본 연구자들은 거북선의 개판에 대해 단순히 판(板)이라고 설명할 뿐, 철판이라고 명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단재 신채호 선생이 1931년 《조선상고사》를 통해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장갑선이라고 볼 수는 있어도 철갑선이라도 볼 근거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철갑선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서양에서 주로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고 주장 했던 것 입니다. 미국인 선교사 겸 동양학자였던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1843~1928)는 1884년에 펴낸 《은둔의 왕국, 조선》에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 조선군의 군함을 설명하면서 “금속으로 표면을 감쌌다(covered with metal)”이라고 설명했다고 하고 1929년에는 세계 유수의 백과사전인 영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4판에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 군함(first Ironclad war vessel)”이라는 설명이 실리면서 철갑선 주장은 한 때 자명한 사실처럼 간주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의 교육도 이런데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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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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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신문역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 근대신문의 효시는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지인 독립 신문 입니다. 우리나라에 첫 광고는 1886년이었습니다. 주간신문인 <한성주보>에서 1886년 2월 22일자에 실렸던 광고가 우리나라 첫 신문광고였는데 요즘 광고와 달리 한자 24줄로 이뤄진 이 광고는 당시 독일 함부르크에 본사를 둔 무역회사 ‘세창양행’의 광고였습니다. 내용은 세창 양행에서 사고파는 물품에 대해 나열한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광고라는 단어가 없어서 ‘고백(告白)’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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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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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 관련 도서를 읽다보면 어려운 사자성어가 나옵니다. '백면서생'이라는 뜻은 무엇인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송나라의 책 심경지전에 등장하는 고사입니다. 白面書生( 백면서생)얼굴이 하얀 서생( 글공부하는학생)이란 뜻으로, 바깥활동을 하지 않고 오직 집에서 글만 읽고 세상 일에 경험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즉, 실전 경험이 부족한 이를 부정적으로 표현할 때에 주로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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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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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라는 책은 어떤 내용의 책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관자> 라는 책의 저자 관중管仲은 우리에게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로 잘 알려져 있고 기원전 약 725~645년에 활동한 사람으로 이름은 이오夷吾, 자는 중仲입니다. 그는 춘추전국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정치인 가운데 한 명으로, 중국 역사 전체를 놓고 보아도 최고의 정치인으로 손꼽히기에 손색이 없다고 합니다. 이 책이 가지는 다른 고서들과 비교되는 점은 바로 유일하게 기원전 고전 중에서 경제학에 대한 통찰이 들어있는 책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농민에게 돈을 꿔주고 곡식으로 그 빛을 갚게 한다. 그 뒤 높아진 곡식값으로 군수품을 산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렇게 경제학적인 개념을 언급 하 책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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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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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말 또는 마차끼리 부딪히는 사고가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말끼리 부딪히는 경우는 전쟁터가 아니면 거의 없었고 마차 사고나 수레 사고는 있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이 바로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교통사고는 세종대왕이 (옛날에는 번차추마(翻車墜馬) 수레를 타고 가다 뒤집히고 말에서 떨어져 다치는 것이 교통사고였음)였습니다. 이 사건은 세종이 대마도 정벌을 하러 가다가 당한 사고로만 알려져 있고 누가 책임을 지고 벌을 받았는지까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영화< 천문> 에서는 장영실이 개발한 수레라고 설정 된바가 있지만 그것은 그냥 영화 일 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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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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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흐(Pyhrr)는 무슨 인물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국의 피터 파이흐(Peter A. Pyhrr)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라는 회사에서 회계 관리자로 근무하면서, 회사의 재정 효율화를 위해 도입한 사람 입니다. 그가 도입한 예산 제도를 영기준예산제도(零基準豫算制度, Zero-based budgeting)라고 하는데 예산을 편성할 때 전년도 예산에 기초하지 않고 영(0)을 기준으로 원점에서 재검토한 뒤 예산을 편성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1970년대 미국에서 기존의 점증주의 예산제도를 비판하며 개발된 예산 제도인데 보통 영어 명칭의 앞글자를 따서 ZBB라고 일컬어진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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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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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라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뭔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핵심적인 길드의 특권은 해당 도시에서 재화와 용역의 판매에 대해 독점적 지위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길드는 상품의 최소가 또는 최대가를 조정하였고, 거래 개시와 종료 시간을 결정하였으며, 도제의 수를 제한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상거래와 관련한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길드의 결정에 따라 정해졌다는 데요. 이를테면 길드의 이익을 위해 자유로운 경쟁을 규제하거나 상품이나 용역의 품질 기준을 마련하였고 도제 고용의 심사를 통해 이주민이나 여성의 고용을 배제하기도 하였습니다. 곳에 따라서는 비기독교인의 경제 활동을 가로막는 길드도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독일 지역의 길드는 유대인을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길드의 목적은 배타성을 띠며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를 보호 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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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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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사람들은 아직도 손으로 밥을 먹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요즘은 많이 없어진 편입니다. 불과 몇 십년 전만 해도 힌두교의 영향으로 오른손이 가장 깨끗한 것으로 생각 해서 식사를 오른손으로 했다고 합니다. 남들이 먹던 포크나 수저를 쓰는 것이 오히려 더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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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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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은 구체적으로 어떤 작전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50년 9월 15일, 더글라스 맥아더 지휘 아래 조선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인천에서 유엔군과 대한 민국 국군이 펼친 상륙 작전 입니다. 처음 생각한 곳은 군산시 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군산은 상륙조건 자체는 좋으나 북한군의 보급선을 하나도 끊지 못하며, 북한군 병력도 하나도 포위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고, 이런 점 및 맥아더 장군 자신의 소신으로 인해 맥아더 장군은 혼자서 끊임없이 인천 상륙을 주장했다고 하지요. 참가부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7합동기동부대 Joint Task Force SEVEN - 지휘관: 아서 듀이 스트러블 해군 중장미군혼성 제10군단 - 지휘관: 애드먼드 알몬드 육군 소장해병대 제1해병사단 - 지휘관: 올리버 스미스 , 중장 육군 제7보병사단 - 지휘관: 데이비드 G. 바 육군 소장한국군해병대 제1연대- 지휘관: 신현준 해병 대령(미 제1해병사단 5연대에 배속)육군 제17연대 - 지휘관: 백인엽육군 대령(미 제7보병사단에 배속)영연방 연합군(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군) - 지휘관: 윌리엄 G. 앤드루스 해군 소장네덜란드군인천에 상륙한다고 해서 D-day(9월 15일)에 준비하고 있다가 그날 한번에 공격한 것이 아니라 인천상륙작전 이틀 전에는 인천~군산, 삼척, 마량도(함경남도) 등 주요 해안에서 대규모 폭격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교란 및 기만작전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적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인천상륙에 방해가 될만한 주요 시설을 파괴했다고 합니다. 일종의 사전 정지 작업인데요. 인천은 9월 10일부터 미 해군과 공군을 동원하여 월미도를 비롯해서 인천지역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하고 뿐만 아니라 적의 판단을 흐리고 혼선을 주기 위해 인천에서 군산 사이의 해안선에 지속하여 포격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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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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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 여인들이 과도한코르셋으로 가는 허리를 만들려고 노력한 이유는 무엇때문인가요?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세가 아닌 18세기 르네상스에 접어들어 육체의 아름다움과 관능을 추구하게 되면서, 사람들이 흔히 중세 유럽 드레스 하면 떠올리는 속옷 이지요. 개미같이 가는 허리에 치마를 분수처럼 풍성하게 부풀려 여성의 아름다운 곡선미를 극단적으로 과장한 실루엣이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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