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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러스
사일러스23.05.31

원시 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어떻게 했나요?

청동기 시대에는 고인돌이라고 해서, 지도자가 죽으면 고인돌 등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구석기나 신석기 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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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격적으로 무덤을 만들고 매장의례를 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입니다.

    시체를 대부분 땅에 묻고 고인과 관련된 도구를 함께 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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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31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속속 발견, 조사되고 있으나 이 시기의 매장 흔적이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는 아직 없습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도 조개더미에서 인골이 나온 예가 있기는 하나 무덤이라고 이름붙일만한 유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중국이나 일본의 예로 미루어 가능성은 있어 보입니다.

    중국의 앙소문화기(仰韶文化期)의 반파유적(半坡遺蹟)에서는 집단 매장된 무덤에서 토장과 옹관 등이 확인되었고 용산문화기(龍山文化期)에 속하는 무덤도 발견되었습니다.

    일본의 경우도 둥근 모양의 토장이 발견되고 있어 사체 매장에 의한 무덤의 조성이 확인되었습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 무덤의 형태도 다양화하고 무덤 조성에 들인 정성도 깊어져서 당시의 문화와 역사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무덤은 전통적인 토장묘 이외 중국의 황하유역에서 발달한 토광묘[土壙墓, 토갱묘(土坑墓)] 등 토총계통과 지석묘 · 석관묘 · 석곽묘 · 적석총 등 석총 계통까지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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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무덤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이 기존의 논리였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인돌의 발굴과 연구를 진행하면서 신석기시대부터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아마도 석기 시대에도 사람이 죽으면 매장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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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례>

    원시시대 사람들은 자연 현상과 천재지변의 발생을 경이와 공포의 눈으로 보았으며 4계절의 운행에 따른 만물의 생성화육(生成化育)으로 인간이 생존할 수 있음을 감사하였다. 동시에 천(天)·지·일·월·성신(星辰)·산·천(川)에는 모두 신령이 깃들여 있다고 생각하여 신(神)의 가호로 재앙이 없는 안락한 생활을 기원하였는데, 이것이 제사의 기원이다. 제사는 인문(人文)의 발달에 따라 일정한 격식을 갖추었으며 이것이 곧 제례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요(堯)·순(舜) 시대에 천신(天神)·지기(地祇)·5악(嶽)·4독(瀆)을 제사한 기록이 《서경(書經)》 《사기(史記)》 등에 실려 있다. 특히 동양에서는 윤리 도덕 관념의 앙양과 함께 조상숭배가 크게 성행하여 조상에 대한 제례가 하(夏)·은(殷) 시대를 거쳐 주대(周代)에 확고하게 갖추어졌다.

    한국에서 제례의 시초는 부여(夫餘)에서 영고(迎鼓)라 하여 12월에 하늘에 제사하였고, 고구려에서는 동맹(東盟)이라 하여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냈으며, 동예(東濊)에서는 무천(舞天)이라 하여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낸 기록이 있다. 마한(馬韓)에는 소도(蘇塗)라는 신역(神域)이 있어 솟대를 세우고 북과 방울을 달아 천군(天君)이 신을 제사지냈다. 신라에서는 남해왕(南解王) 때에 혁거세묘(赫居世廟)를 세우고 혜공왕(惠恭王) 때에 5묘(廟)의 제도를 정했으며 산천도 제사지냈다.


    백제에는 동명묘(東明廟)가 있었다. 고려시대에 중국의 제도를 본떠 원구(圜丘:천신을 제사지내는 원형의 단)·방택(方澤:지기를 제사지내는 사각형의 단)·사직(社稷)·종묘(宗廟)·능침(陵寢)·선농단(先農壇)·선잠단(先蠶壇)·문선왕묘(文宣王廟:공자의 사당)·마조단(馬祖壇)·사한단(司寒壇:氷神을 모신 단) 등을 설치하고 예절을 갖추어 제사지냈다. 그리고 명산·대천·우사(雨師)·운사(雲師)·뇌사(雷師) 등도 제사지냈다. 조선시대에도 원구와 방택만을 제외하고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사가(私家)의 제례는, 고려시대에는 대부(大夫) 이상은 증조까지 3대, 6품(品) 이상의 벼슬아치는 할아버지까지 2대, 7품 이하의 벼슬아치와 평민은 부모만을 가묘(家廟)를 세워 제사지내게 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근거를 두어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고조까지 4대를 봉사(奉祀)하게 했다.

    오늘날에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종약원(宗約院)이 거행하는 종묘의 제향, 서울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서 유림(儒林)이 거행하는 문묘(文廟)의 제향, 유림이 거행하는 각 서원의 제향, 사가의 조상 제사 이외의 다른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장례>

    장사를 지내는 일. 또는 그런 예식. ≒빈례(殯禮)·양례(襄禮)·장의(葬儀).

    장례를 치르다

    장례를 모시다

    모친의 초상 때는 해 도사가 와서 장례 절차를 도와주었다.≪박경리, 토지≫

    상여도 없고 명정 같은 것도 하나 없는, 참으로 간단한 장례 행렬이었다.≪하근찬, 야호≫

    택시를 몰고 망우리로 망인의 누운 자리를 장례 후 처음으로 찾아갔었다.≪염상섭, 수절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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