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병마사라는건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시대 중앙군의 지휘관이다 이들은 평시에는 임명되지 않고, 비상시 군의 출동이 필요할 때 임명되었다. 이 제도는 북방의 특수지역인 동계(東界)·북계(北界)의 양계(兩界)에 각기 군사·행정을 담당하는 기구로 두어졌다. 구성은 병마사(3품) 1인, 지병마사(知兵馬事, 3품) 1인, 병마부사(兵馬副使, 4품) 2인, 병마판관(兵馬判官, 5∼6품) 3인, 병마녹사(兵馬錄事) 4인이었다.또한 양계 병마사에는 위치가 미상인 고정적인 영(營)이 있었고, 영리(營吏)도 있었다. 따라서 양계 병마사는 관직의 이름이면서 관제의 이름이기도 하였다. 양계 병마사는 989년(성종 8)에 처음 설치되었고, 현종 때에는 군사적 기능 외에 행정적 기능이 추가되었다. 정종(靖宗) 초에 6개월 임기제가 정해지면서 지방제도로 확정된 것 같다.1039년(정종 5)에 병마녹사 가운데 1원을 감축하였다. 무신란 이후에는 문반 위주였던 양계 병마사·지병마사 등에 무반출신자들이 임명되었다. 또한 양계의 방수장군(防戍將軍)에게 병마판관을 겸대하게 했다가, 1198년(신종 1)에 병마부사로 승격하였다.이후 몽고의 침략으로 이들 지역의 대부분을 상실함으로써, 양계 병마사 제도의 존재의의가 거의 상실되었다. 1290년(충렬왕 16)의 북계 수복과 1356년(공민왕 5)의 동계 쌍성(雙城) 수복 이후 양계 병마사가 다시 파견되었다.그러나 이 때는 이들 지방에 제사(諸使)가 빈번하게 임명, 파견되는 상황이어서, 그들의 지위와 기능은 자연히 격하·약화되었다. 공민왕 때에는 왜구와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전국이 전쟁터로 되었다. 이에 따라 1362년(공민왕 11)에 동경도(東京道) 등 12도에, 이듬해에는 안동도(安東道) 등 13도에 병마사를 파견, 병마사의 전국적인 배치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양계의 병마사는 그 명칭이 군사적 기능을 나타내고 있는 점, 강력한 지방병력이 배치된 북방 변경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점, 『고려사』 백관지의 ‘곤외(閫外 : 궁궐 밖)를 전제(專制)한다’는 기록 등으로, 흔히 북경(北境) 방위사령부 및 그 최고사령관인 것으로 생각되어왔다.그러나 제도(諸道)의 일반 지방관·안찰사(按察使) 등의 군사행동과 비교해 본질적인 차이가 없으며, 지방장관으로서의 행정면의 기능은 명확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양계 병마사는 군사·행정 양면의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Q. 고려시대 2성 6부는 어떤 조직체제였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982년(성종 1년)에 3성 체제가 도입되어 내사성, 문하성, 상서성이 설치되었는데, 기능이 밀접한 내사성과 문하성이 합쳐져 내사문화성이 되어 최고 정무 기관으로 기능했다. 1061년(문종 15년)에 내사성이 중서성으로 개칭되면서 중서문하성으로 되었다. 당나라 제도에서는 3개의 관청이 각기 제 기능을 하는 3성 병립제였는데 반해, 고려에서는 2성 체제를 이루었다. 중서문하성이 국가의 정무를 의논하는 최고의 정치 기관이었고, 상서성은 결정 사항을 실천하는데 그쳤다. 즉 상서성과 중서문하성은 상하 종속 관계에 있었다. 6부는 이부, 병부, 호부, 형부, 예부, 공부의 순이었다. 최고 정치 기구로서의 중서문하성의 권한과 지위는 고려 후기에 오면서 도병마사의 후신인 도평의사사로 옮겨갔다. 학계 일부에서는 중서문화성을 하나의 관부로 보는 것은 오류이며, 중서성과 문하성을 병칭하는 말일 뿐 3성제였다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