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상정고금예문과 직지심체요절의 역사적 우수성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상정고금예문"예전부터 지금까지(古今) 내려오는 사람이 지켜야할 예의들을 기록(禮文)한 것으로 이후 [[최충헌]]이 책이 오래되고 낡았음을 지적하며 부족한 부분을 다듬어 새로 재작했다. 총 2부를 만들어 1부는 자신의 집에, 1부는 궁에 놔두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 고종]] 재임기인 '''[[1234년]]'''~[[1241년]]에 당시 집권자인 [[최이]]가 이를 '''금속활자로 찍어 배포'''했다.[* 한국사 시험 문제에서 [[이규보]]나 몽골의 침략사, 고려의 문화사와 관련지어 보기로 제시되는 경우가 있지만 현존하지 않는 서적이기 때문에 [[직지심체요절]] 이나 다른 고려시대의 서적들보단 출제 빈도가 낮은 편이다.~~그러나 멘붕을 막기위해 이름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그러다 몽골의 침입이 일어나게되고 급히 천도를 하느라 궁에 있던 1부는 불에타 없어지고 최충헌의 집에 있던 1부가 가까스로 남아 이를 최우가 총 28부를 복사해 나누어 주었다. 이 때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따르면 금속활자인 주자(鑄字)로 28부를 찍어 정부 기관에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것이 사실이라면 상정고금예문은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기록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 [[1377년]]이다.] 다만 [[여몽전쟁]]으로 온 나라가 난리였던 통에 금속활자를 개발 및 주조를 할 여력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미 그 전부터 고려에 금속활자 개발 기술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으며 실제로 [[최이]]가 쓴 또다른 글에 따르면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금속활자는 남아있지 않으나 목판본은 남아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보물]] 제758호.]를 주자로 찍어내어 민간에 배포했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이전부터 고려가 금속활자 제조기술을 가지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사실은 알수가 없다"직지심체요절"1377년 [[고려]] [[청주시|청주]] [[흥덕사]]에서 고승이었던 백운경한이 쓴책을 금속활자로 뜬 것]]이다. 이 경전은 학승들이 대교과(大敎科)를 마치고, 수의과(隨意科, 현재의 대학원 혹은 사회 학습)에서 공부하는 데 사용되는 학습서 역할을 했다. 그 후 행방은 알 수가 없다가 구한말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구한말 당시 [[주한프랑스공사관|주한프랑스공사]]이자 고서적 수집광이기도 햤던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가 수집한 고물품들 중에 직지심체요절이 포함되어 있었다.빅토르 콜랭 드의 이름은 한자로 갈림덕(葛林德)]]이라고 한다. 아마도 '콜랭 드'를 한자로 적은 것 같다. 때문에 직지의 첫 페이지에는 갈('[[葛]]')이라는 글자가 붙어있다. 이후 1911년 앙리 베베르라는 사람이 재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베베르가 사망한 뒤 그의 유언에 따라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보내졌다. 1900년 파리 엑스포 한국관에 소개되기도 했으나 당시에는 서양 중심의 세계관은 접어두더라도 오리엔트(근동) 지역에서 워낙 유물 유입이 빈번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그런데 [[외규장각]] 도서와 함께 알려졌기 때문에 직지심체요절까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한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직지심체요절은 외규장각에 있지도 않았다. 외규장각과 직지심체요절이 프랑스로 가게 된 바에는 하등 관계가 없다. 9급 공무원 시험과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도 이 점을 노리고 문제가 출제된 바 있다. 둘 다 약탈과 관련된 문항을 고르면 틀리는 함정문제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이라는 사실도 1972년 [[박병선]] 박사에 의해 밝혀졌다. 발견 당시 학계에서는 직지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성경|성서]]보다 더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말을 믿지 않고 무시했기 때문에, 결국 박병선 박사는 혼자서 연구를 시작했고, 한국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기어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임을 입증해낸다. 이로써 그녀는 '''직지대모'''로 불리게 된다.
Q. 중세시대 흑사병으로 유럽의 인구가 엄청나게 죽었다고 하던데 얼마나 죽었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흑사병'''(Black Death) 또는 '''역병'''(Plague, ''플레이그''), '''대역병'''(Great Plague, ''그레이트 플레이그'') 사태는 [[1346년]]에 유럽 동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353년]]까지 유럽 전역을 강타했던 [[범유행전염병|대규모 전염병의 유행]]을 이른다.이때 창궐한 질병의 원인균은 DNA 추적 결과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된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일 가능성이 유력하며, 2022년 독일/영국 공동연구팀이 역학조사를 통해 이를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https://news.v.daum.net/v/20220616112034808|#]] 일부 학계에서 [[에볼라 출혈열]] 등의 이견이 있으나 주류는 아니다. 여기에 더하여, 만약 14세기 직전의 소창궐과 15세기 이후 3차 대역병의 유행이 모두 같은 페스트의 창궐이었다면, 페스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혔던 [[범유행전염병]]이 된다.[* [[범유행전염병]] 중 1위라는 것이지, 단순 질병 중 1위는 아니다. 감염성 질병 가운데 가장 많은 인류를 살해한 질병은 그 자체가 '[[마마|마마(역병신)]]'라고 불린 천연두이며, 미래에는 [[인플루엔자]](독감)가 그 기록을 경신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사태 이전 세계 인구는 4억 5천만 명에 달했으나, 대역병의 풍파가 지나간 후 15세기에는 3억 5천만으로 줄었다. '''최소 1억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다만 인구 수 조사만의 자료임으로 흑사병에 감염되어 죽은 것만이 아닌, 간접적으로 죽은 이들도 포함하는 수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예를 들어 흑사병으로 의사가 죽을 경우, 그 의사가 커버하던 지역의 사고 등으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치료받지 못해서 죽는다. 문제는 열악한 중세의 의료여건상 안그래도 사망률이 높은 판에 그 현장에 모두 참가해야하는 의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흑사병에 접촉할 확률이 매우 높으며 따라서 사망률이 매우 높을 수 밖에 없었다는것이다.] 이외에 정확하지는 않으나 전 세계적으로 2억 명이 넘는 사람이 같은 시기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역사상의 한 기간에 발생한 사망자 통계 가운데 가장 급격한 증가이다. 특히 그 기세는 1348년에서 1350년 사이의 3년간 최고조에 달하여, 유럽 인구의 1/3에서 절반에 이르는 사람이 사망했다. 지역에 따라 발병률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벨기에]]나 [[폴란드]][*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3세]] 국왕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흑사병이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국경을 빠르게 봉쇄했고 폴란드는 경제의 대부분이 농업 위주에 자급자족이라서 국경차단으로 인한 피해가 그리 치명적이진 않았다.]의 경우 사망률이 20%에 그쳤던 곳도 있으나, 보다 극심한 지역은 사망률이 80-90%까지도 집계되었다.
Q. 강릉단오제의 역사가 어떻게 되는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명실상부한 국제적인 전통행사이다 보니, 예전엔 중구난방에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던 행사장인 남대천 둔치를 전면 보수하고 행사장과 장사하는 곳을 완전 분리시켜 놓았고, 행사가 없는 평상시에도 주차를 금지하게 하는 등 강릉시에서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예전엔 행사 첫 날에만 하던 불꽃놀이가 이젠 첫 날과 마지막 날 밤에 화려하게 펼쳐진다. 단, 2009년 단오제 행사는 2010년에는 [[천안함]] 사태가... 그리고 2015년에는 [[메르스]]사태 때문에 제례행사를 제외한 모든 행사가 취소된 바 있다. 그러나 5년 후 이번엔 [[코로나19]]사태 때문에 제례행사를 제외한 모든 행사가 온라인으로 진행하다가 22년도 코로나 방역지침 완화로 정상운영 하면서 남대천 단오장 방문객이 전년 대비 '''1,041%'''상승하였다.다만 이렇게 문화재로서의 관리에는 철저히 노력하는 반면, 외부 관광객 유치에 치중하느라 지역민들이 즐길 수 있는 요소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진 감이 있다. 2000년대 초만 해도 훨씬 지역적이고 친근한 동네 잔치 같은 느낌이었지만, 2000년 중반 이후로는 지역과는 오히려 서서히 유리되면서 5일장 이상도 이하도 아닌 어중간한 행사가 되고말았다. 덕분에 축제 참가자의 숫자가 급락하고, 이렇게 구매층이 줄면서 판매자도 줄고, 결국 그렇게 축제가 동네 잔치보다는 문화행사에 더 비중이 쏠리게 되었다. 문화제 지정 이전에는 단오장 주변의 교통이 현재보다 훨씬 지옥같았지만 단오 장거리에 강릉시내에서 구하기 힘든 게임 카트리지 등을 판매하는 장사꾼들도 있었다. 2016년 기준 단오장에는 장사꾼들이 판매하는 품목들이 거기서 거기다보니 그때의 기억하던 강릉사람들은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 또한 강릉 단오제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당시, 중국 언론에서 단오를 뺏어간다느니 하고 우기며 한국을 비난했다. 단옷날(음력 5월 5일)부터 열리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그 시작점은 대관령 산신제다. 허균이 34세이던 1603년(선조 36) 여름, 당시 수안군수를 역임하고 모친과 함께 외가인 강릉 사천의 애일당에 내려와 약 4개월 간 머물렀을 때 강릉단오제를 보았다. 그에 의하면 명주 사람들이 5월 길일을 택해 대관령 산신인 김유신 장군을 괫대와 꽃으로 맞이하여 부사에 모신 다음 온갖 잡희를 베풀어 신을 즐겁게 해준다고 하였다. 신이 즐거우면 하루 종일 괫대가 쓰러지지 않고 그 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화를 내면 이것이 쓰러져 그 해는 반드시 풍재나 한재가 있다고 말한 수노(首奴)의 이야기를 그대로 적고 있으며, 이 말을 듣고 자신도 이상하게 여겨 그 날 가서 보았더니 과연 괫대가 쓰러지지 않아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환호성을 지르고 경사롭게 여겨 서로 손뼉을 치며 춤을 추었다 하였다
Q.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쌓았다고 하는데 실제로 천리나 되는 장성이 맞나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국사]]에서 두 차례, [[고구려]]와 [[고려시대]]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위치의 [[장성]]. 본래 사서에 기록된 이름은 그냥 장성(長城)일 뿐이고, '천리장성'이라는 이름은 오늘날에 사학자들이 '천리가 되었다.'는 기록에 따라 임의로 붙인 이름이나, '천리장성'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만리장성이라는 이름도 똑같다. 이름은 따로 없고 그냥 '장성'이지만, 후에 '만리'장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본고장 중국인들은 아직도 장성이라고 부르며, 그래서 영어명이 'The Great Wall'인 것이다.] 길이를 따져보면 고구려 천리장성은 천 리보다 훨씬 길다. 고려가 쌓은 장성은 길이가 천 리와 비슷하다.사실 '리'라는 단위가 시대와 나라별로 차이가 조금씩 있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