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정몽주가 이성계와 협력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죽어서도 고려 임금을 섬기는 마음을 바꾸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은 이 시는 ‘단심가’라고 불리지요.*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고 부하 조영규를 불렀어요. “오늘 밤 정몽주를 없애도록 하시오.” “예, 알겠습니다.”*조영규는 쇠뭉치를 들고 선죽교 밑에 숨어 정몽주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어요. 한참을 기다리자 드디어 정몽주가 나타났어요. 정몽주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주막에서 술을 한잔 마시고 오는 길이었어요.*“휴우, 이방원이 드디어 나를 없앨 모양이니 그만 가봐야겠구나!”*정몽주는 기울어 가는 고려와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며 긴 한숨을 내쉬고는 시종에게 말을 가져오게 했어요. 정몽주는 말에 거꾸로 올라탔어요.*“대감 마님, 말을 거꾸로 타셨습니다.” 시종은 정몽주가 술에 취해 실수를 한 줄 알고 웃으며 말했어요.*“알고 있다.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기가 얼굴을 덮칠 것이 끔찍해 말을 거꾸로 탔느니라.”*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정몽주는 결국 조영규가 휘두른 쇠몽둥이에 머리를 맞고 선죽교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어요.
Q. 꿈의 무대 MLB에 진출한 한국선수는 누구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박찬호,류현진,추신수,최지만,김하성,배지환 등앞으로 바람의 손자 이정후도 보게될겁니다. ㅋㅋ
Q. 강감찬은 어떤업적을 세웠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 역사에서 '3대 대첩(大捷)'을 꼽는다면, 두말 할 것도 없이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이순신의 한산대첩(閑山大捷), 그리고 강감찬(姜邯贊)의 귀주대첩(龜州大捷)을 든다. 그중 고려 시대 거란의 수십만 대군을 맞아 귀주에서 섬멸한 귀주대첩을 이끈 장군이 바로 강감찬이다.강감찬은 948년(정종 3)에 태어났다. 그의 탄생과 관련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한 사신(使臣)이 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오는데 큰 별이 어떤 집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가 사람을 보내 찾아보니 마침 그집 부인이 사내를 낳았다. 그가 바로 강감찬이었다고 한다. 강감찬의 어릴 때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강감찬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할 때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된 강궁진(姜弓珍)이다. 《고려사》에는 강감찬이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신통한 지략이 많았다고 전한다.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사실 때문에 강감찬을 무인으로 알기 쉽지만, 사실 강감찬은 문관이었다. 983년(성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복시(覆試)에서 갑과에 장원한 뒤 관직에 오른 후 예부시랑·국자제주(國子祭酒)·한림학사·승지·중추원사·이부상서를 역임했다.1010년(현종 1), 거란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두 번째로 고려를 침략했다. 우여곡절 끝에 등극한 현종은 전쟁에 미처 대비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고려군은 속수무책으로 패전을 거듭했다. 이때 강감찬은 장수로 나서지는 않았으나 왕에게 끝까지 항복하지 말 것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왕이 피신한 사이 다행히 양규(楊規)가 무공을 크게 세워 거란을 물리쳤다. 그러나 거란은 1018년(현종 9)에 또다시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강감찬이 나섰다. 강감찬은 흥화진(興化鎭)과 귀주(龜州)에서 뛰어난 전략과 기지로 거란군을 대파하고 승리했다. 고려는 안정을 되찾아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Q. 일본인에게 신사참배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행사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사(神社)란 일본 황실의 조상이나 신대(神代)의 신 또는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을 말한다. 본래 메이지[明治] 일왕 시절 일본 군인들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1869년 '쇼콘샤[招魂社]'라는 명칭으로 창건됐으나, 1879년 '평화로운 나라'라는 뜻의 야스쿠니로 개명했다.야스쿠니 신사는 청일전쟁 · 러일전쟁 · 만주사변 · 제2차 세계대전 등 일본이 벌인 주요 전쟁에서 숨진 군인 및 민간인 246만 6000여 명의 위패를 보관해 두고 이들을 신격화해 제사를 지내는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 유물 및 전범들의 동상도 전시되어 있다. 제사는 매일 지내며 봄·가을에는 대규모 위령제를 열고 일본 건국일(2월 11일) 등 기념일에는 수시로 각종 행사를 벌인다. 특히 종전기념일인 8월 15일에는 우익들의 순례성지로 변한다.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왕실이 경비를 부담하는 특별 관폐(官幣) 신사로서 제국주의 시절에는 군국주의 확대정책을 종교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일왕 숭배와 군국이념을 조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국영 신사라는 지위가 박탈되면서 국가관리에서 벗어나 일개 종교법인으로 격하됐으나, 국가적 보호를 둘러싼 논의는 현재까지도 분분하다.
Q. 미국은 과거 베트남전쟁을 참여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1950년대 중반, 트루먼 대통령이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돕기 위해 지원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당시 냉전 중이던 미국 정부에서는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는 모든 국가를 돕는 것이 미국의 역할이라는 의견이 팽배했다. 트루먼의 뒤를 이은 아이젠하워, 케네디 그리고 존슨 대통령 역시 이러한 미국의 역할에 의견을 같이하며, 만약 한 국가가 공산주의에 무너지면 주변 국가도 무너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도미노 효과'에 기초하여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데 치중했다.통킹만 사건도 직접적 이유가 되었지요
Q. 측천무후가 최초로 여황제가 될수 있었던 이유가 먼가요?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측천무후는 400명이나 되는 중국황제 중에서 유일한 여황제로서, 중국을 태평성대로 이끈 위대한 통치자라고 알려져 있는 반면,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친아들마저 죽이고 여황제로 등극한 사악한 통치자라는 두가지의 서로 다른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혹자는 측천무후, 서태후, 여태후를 중국의 '3대 악녀'라고 부르는데, 이 세명의 악녀 중에서도 특히 측천무후의 잔인성이 가장 두드러진다고 할 정도로 그녀는 정말 대단한 악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왜냐하면, 권력욕망이 강했던 여태후와 서태후도 자신의 아들만큼은 죽이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측천무후는 권력 획득을 위해서 자신의 친아들마저도 죽였을 정도로 그녀의 잔악성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