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태종의 장자 양녕대군은 어떤 이유로 세자 자리를 세째 아들인 충녕대군에게 빼앗겼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선, 당시는 조선의 극 초기 였기 때문에 현재 사람들이 생각하는엄격한 도덕주의 조선 같은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습니다.오히려 매우 활발한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죠그리고 양녕과 충녕 사이의 차이가 너무 심했습니다양녕은 술과 사냥, 여자 등 당대의 노는 것이라면 눈이 뒤집혀 온갖 사고치고 다녔으며말년에는 며느리도 건드렸다는 인간 쓰레기 였습니다그래서 장자계승의 원칙을 어겨서 생기는 왕권손실보다양녕이 왕이됬을대의 피해가 더 크다고 판단된 것이죠.다른 후계자가 없다면 또 모를까, 한번 잡은 책은 책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는 충녕이 있으니까요.마지막으로, 태종의 카리스마가 압도적이었습니다.아빠 친구였던 정몽주를 방해된단 이유로 대낮에 살해하는 과감성과형을 이용해서 최대한 정상적으로 왕위를 승계받는 침착함을 겸비한 태종이니마지막 까지 고민하긴 했지만 결국 충녕을 선택하는 성공적 선구안을 발휘한 것 입니다
Q. 고구려는 평민과 왕족의 결혼이 가능 했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왕족끼리, 귀족끼리 결혼하는 것은그렇게 결혼해야 정치적, 권력적, 무력적 등등 이득이 어마무시해서평민이랑 결혼하면 상대적 손해이기 때문이고그래서 평강공주는 온달과 결혼해서 왕족자리에서 쫓겨 났고 온달이 전쟁에서 엄청나게 활약해자기랑 공주 결혼한게 개이득이란걸 입증하기 전까지 왕족이 아니었습니다.물론 이것은 설화를 그대로 해석한 것이고역사학계에선1 온달은 평민이 아니라 몰락한 귀족층이었다2 온달은 "해외이민자" 였다같은이유로 천대받던 온달에게 왕이 자기 딸을 붙여줘서기존 귀족들을 압박하는 신진세력을 키운 것이란 가설을 현실적 해석으로 보고 있습니다아무리 평강공주의 추진력이 굉장해도 왕이 딸 가출하는걸 못막았다는건 이상하니까요
Q. 만두이야기가 삼국지에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원전에도 만두를 먹었단 기록이 있는 만큼너무 오래전에 발명된거라 유래는 정확히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말씀하신 삼국지 유래설은날씨가 거칠어 강을 건널수 없개되자 근처 사람들이 사람머리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했는데제갈량이 걍 머리모양음식을 바치라고 했다는 여러 유래중 하나이며그 밖에는 기원전 메소포타미아의 요리인 요시파라' 가 전파된 것이라는 설,장중경이라는 의사가 동상걸린 사람을 위해 따듯한 영양식으로 만두탕을 발명했다는 설등등 다양한 설이 있습니다참고로, 한국에서 흔히 생각하는 고기만두는 중국에선 마오쯔, 소룡포 라고 따로 부르며만두의 중국발음인 만터우는 속없는 찐빵같은 모습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