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순종황제의 친일 행위가 실제로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순종의 아버지인 고종이 일제의 강요로 헤이그 특사 사건을 벌였지만 각국의 정부에서 이미 을사늑약을 승인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독자적인 외교행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회의 참석은 좌절되었습니다.일제는 이를 조약 위반으로 규정하고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하였으며, 고종은 어쩔 수 없이 황위를 순종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즉위의 과정이 순리에 따른 것이 아닌 일제의 강제력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후 친일적인 인사들이 내각에 기용되는 가운데 갑오개혁이 계속 진행되었고, 이를 타계하기 의하여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함에 따라 순종 역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습니다.1년 후인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어 하여 황제에 올라 대한제국을 선포함에 따라 순종은 황태자로, 세자빈은 황태자비로 책봉되었습니다. 친일 행위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단정할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 조선 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Q. 장보고의 해상무역 장악의 배경은?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보고는 9세기 초반, 통일신라의 무장이자 해상 호족으로 활약한 인물입니다. 장보고는 일찍이 당으로 건너가 승마와 창술에 재능을 보이며 무관으로서의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후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백성들이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리고 있는 상황을 목격하고, 해적 토벌과 함께 노예 매매 금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세우고, 동중국해 해상권을 장악한 뒤 중국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 했습니다. 그는 산동성 문등현 적산촌에 법화원을 건립하고 후원했으며, 강력한 군대와 수많은 선박을 보유하면서도 부를 축적해 거대한 지방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장보고는 출신도 알려져 있지 않을 정도로 미천했고 지방 호족에 불과했지만 중국, 일본, 통일신라 중앙의 왕실에까지 그 영향력이 미칠 정도였으며 희대의 영웅이라 불릴만한 행보를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