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매년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정기시와 부정기시로 나눠져있으며, 정기시는 3년에 한번 열렸다고 합니다.다음의 내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조선시대 과거에는 소과·문과·무과·잡과의 네 종류가 있었으며, 또한 정기시(定期試)와 부정기시(不定期試)의 구분이 있었다.정기시는 3년에 한 번 열린 식년시 하나밖에 없었으나, 수시로 열린 부정기시는 증광시(增廣試)·별시(別試)·알성시(謁聖試)·정시(庭試)·춘당대시(春塘臺試) 등이 있었다. 이 중 식년시와 증광시는 소과·문과·무과·잡과가 모두 열렸으나, 별시·알성시·정시·춘당대시는 문과와 무과만이 열렸다.시험 시기는 식년시를 예로 들면 처음에는 모든 시험을 식년(子·卯·午·酉) 정월에서 5월 사이에 거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향시인 초시에 합격한 자들이 서울에 올라와 복시에 응시하는 데 기간이 촉박하였고, 또 농번기에 수험생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농사에 방해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1472년(성종 3) 초시를 식년 전해인 상식년(上式年) 가을에, 복시를 식년 봄에 거행하기로 하였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거(科擧))]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4562
Q. 아주 옛날에는 절이 도시에 있었다고 하던데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절이 산속에 있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산지형 사찰이 가장 보편적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우선 탈속주의와 풍수지리설의 영향 때문이다. 앞서 밝혔듯 산악신앙이 유행하기에 알맞은 지리적 조건이다. 국토의 시원지를 백두산으로 삼았고 조상들은 산신이 나라를 지켜준다는 믿음이 강했다. 곤란에 처하거나 가뭄이 들면 산신에게 운명을 맡겼다. 금강산의 봉우리들이 불보살의 이름으로 장식된 사실에서도 산악신앙의 강렬함을 엿볼 수 있다.세속권력과의 거리를 두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신라 말 선승의 결집을 이룬 구산선문은 말 그대로 산문(山門)이다. 수도였던 경주와 일정하게 떨어져 제도권의 귀족적 불교에 저항했다. 수행과 청빈으로 일관한 삶으로 민중의 호평을 받았다.하지만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이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고 합니다.물론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조선왕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이었다. 이성계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의 집권층은 중앙집권적 체제 강화를 위해 사찰과 스님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절 땅을 몰수해 세수(稅收)를 비약적으로 증장시켰고, 승려의 대량 환속 조치로 군역을 충당할 머릿수를 대폭 늘렸다. 3대 임금 태종은 242개의 사찰만 남겨두고 모조리 없앴다. 빈털터리에 천민 대접을 받는 스님들은 백성들의 눈에 띄는 곳에 남아날 수가 없었다. 극소수의 원찰을 제외하고는 모든 절이 산 속으로 숨어들어 무속과 함께 연명했다. 그러나 기어이 살아남은 절들은 유서 깊은 기도도량으로 오늘날까지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5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