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조선왕조 실록에 무지개에 관한 기록도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왕조실록history.go.krhttps://sillok.history.go.kr › kva_12201015_001어제 있었던 무지개의 변은 또 어찌하여 일어났는가. ... 지금의 일이 국사(國史)에 기록되고 야사(野史)에도 기록이 되면 후인들이 오늘의 일을 어떻다고 말하겠는가.한국사데이터베이스 비교보기 > 흰 무지개가 나타나다https://db.history.go.kr › item › compareViewer흰 무지개가 나타나다 ( 725년 01월(음) ) ... 이를 암컷 무지개[霓]라 하기도 하였다(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조실록사전』(홈페이지 게시), 백홍관일(百虹貫日)).조선왕조실록 - 국사편찬위원회https://sillok.history.go.kr › kva_12003025_001흰 무지개가 해를 꿰는 재변이 발생하자, 차대를 행해 도움을 구하다 · 【태백산사고본】 44책 44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46책 640면 · 【분류】. 과학(科學) / 왕실(王室) ...조선왕조실록 - 국사편찬위원회https://sillok.history.go.kr › kna_13303002_001"평양 판관(平壤判官) 김태국(金泰國)의 첩정에 '2월 9일 신시(申時)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한 지진이 발생하였다. 11일 사시(巳時)에는 흰무지개가 해를 꿰었고 양쪽에 ...
Q. 미국에 있는 할리우드 라는 곳이 만들어진 계기는 어떻게 될까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무튼 19세기 말에 할리우드가 생겨나긴 했지만 당시는 영화가 발명되지도 않았고, 이후 영화라는 신매체가 등장했지만 그 중심지는 당연히 미국 제일의 도시 뉴욕이었습니다. 미국의 초기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토머스 에디슨입니다. 실질적으로 영화라는 '기계 장치'를 발명한 사람은 에디슨 밑에서 일하던 윌리엄 케네디 로리 딕슨이었지만, 에디슨은 그것을 산업적으로 이용해 막강한 파워를 과시했죠. 그 핵심은 특허권이었는데요, 에디슨은 자신의 발명품을 통해 산업을 독점하려 했습니다.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1908년의 MPPC, 즉 '영화특허권단체'(Motion Pictures Patent Company)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여기에 속한 9개의 메이저 영화사(이른바 '트러스트'(Trust)라고 불리웠던) 외엔 에디슨이 발명한 기계를 사용할 수 없다는 거죠. 게다가 에디슨과 MPPC는 코닥에서 생산하는 필름마저 독점적으로 공급받으려 합니다. 이에 MPPC에 속하지 못한 영화사들은 뉴욕을 떠나 에디슨의 법적인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옮겨 가게 됩니다. 뉴욕의 정반대편에 있는 LA가 바로 그곳이었죠.이주는 1911년부터 본격화됩니다. 특히 D.W. 그리피스가 에디슨의 바이오그래프(Biograph)를 떠나 서부로 향하자 뉴욕의 수많은 인디펜던트 영화사들이 할리우드로 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단지 에디슨의 손아귀를 벗어나 할리우드로 왔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법적 문제가 생기면 멕시코로 도망 가기 좋아서 LA로 왔다고 하는데 이건 낭설이고요. 미국의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에 눈독을 들였던 건, 완벽한 입지 조건 때문이었죠.필름의 감도도 낮고 조명기의 광량도 약했던 시기였기에 영화 촬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빛'이었는데요, 일단 LA 지역은 1년 중 300일 이상 일조 시간을 보장하는 곳이었습니다. 겨울에 비가 많이 오긴 하지만, 스튜디오에서 실내 촬영을 하면 되는 거고요. 날씨도 따뜻했습니다. 게다가 캘리포니아 지역은 산, 사막, 도시, 바다 등 영화 촬영에 완벽한 자연 환경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공장, 농장, 정글, 눈 덮인 산 등이 모두 가능한 곳이었고요. 지역 전체가 하나의 세트였던 셈입니다.이 지역이 개발되면서 유입된 많은 기술 인력도 매력적인 요소였습니다. 아직 노조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 사이엔 경쟁이 붙어서 임금도 쌌죠(뉴욕의 절반 수준이었습니다). 영화 촬영에 필수적인 숙련된 건축 인력, 전기 기술자, 의상 제작자 등이 흘러 넘쳤습니다. 게다가 아직은 땅값이 싸서 널찍한 스튜디오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1915년 통계를 보면, 당시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이 고용한 인원은 1만5천 명에 달하게 됩니다.그렇게 할리우드엔 스튜디오 시스템이라는 게 생겨나게 되는데요, 이때 반드시 언급해야 할 사람이 바로 토머스 인스(Thomas Ince)입니다. 그는 1912년에 산타모니카 해안에 대규모 야외 세트를 세워 '인스빌'(Inceville)이라고 불렀는데요, 처음엔 작은 스튜디오였지만 점차 확장된 인스빌은 사무실, 무대, 의상실, 카페테리아, 창고 등을 갖춘 하나의 도시가 됩니다. 그는 스튜디오 안에서 이루어지는 세부적인 분업 과정을 고안했고, (현장에서 흔히 '콘티'라고 부르는) '콘티뉴이티'(continuity, 촬영 대본)을 처음으로 만들어 영화 제작의 전과정을 통제했습니다. 15분짜리 단편이라고는 하지만, 1년에 수백 편을 제작할 수 있었던 건 그런 이유였죠.
Q. 직지심체요절은 어떤경로로 프랑스로갔나요?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직지는 1886년, 초대 주한 공사로 부임했던 프랑스의 콜랭 드 블랑시(Collin de Plancy)가 1880년대 말에서 1890년대 초 국내에서 수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수집된 직지는 블랑시의 다른 수집품들과 함께 1911년 파리 경매장에 나왔고, 골동품 수집가 앙리 베베르에게 단돈 180프랑에 팔리게 된다. 1952년 베베르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직지를 기증했고, 도서번호 109번, 기증번호 9832번을 부여받아 동양 문헌실에 보관됐다.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한국전에서 직지가 공개되기도 했으나 당시엔 그 누구도 직지를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