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공민왕의 평가가 조선초기와는다르게 후기로 갈수록 부정적으로 변화하는 이유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무엇을 보시고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 전기에도 공민왕은 비판받는 모습이 종종 나옵니다.대표적인 사례는 불교 숭상, 신돈 등용 따위의 것입니다. 또 세조 시기에 국방에 소홀하여 홍건적의 침입을 맞아 도피하였음을 비웃는 내용이 나오기도 합니다. 연산군일기에는 연산군과 공민왕을 비교하며 연산군은 밝고 사리깊은 반면, 공민왕은 혼란했다고 나옵니다. 명종실록에는 공민왕을 "혼주(昏主)", 즉 어리석은 임금이라 표현했습니다.조선 초기에 고대부터 고려까지의 역사를 편집한 «동국통감»에서도 공민왕의 평은 좋지 않습니다. 여기서 공민왕은 처음엔 명성이 있었으나 성품이 사납고 뜨내기들이나 데려다 써서 결국 역적 신돈이 활개쳤고, 왕비가 죽은 뒤엔 사람을 마구 죽이는 등 종사의 멸망을 재촉했다고 나옵니다.즉, 조선의 입장에서 공민왕은 고려 멸망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어야 했기에 전반적으로 평이 좋지 않습니다.
Q.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왜 건국한 나라를 무너트렸나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유사»에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병신년 정월에 견훤은 그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신라 말에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군사는 북쪽의 고려 군사보다 갑절이나 많으면서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 필경 하늘이 고려를 도우는 것 같다. 어찌 북쪽 고려왕에게 귀순해서 생명을 보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 아들 신검(神劍)·용검(龍劍)·양검(良劍) 등 세 사람은 모두 응하지 않았다."- «삼국유사»권제2, 기이2, 후백제 견훤이 내용을 보면 견훤은 고려에 항복할 뜻을 아들들에게 내비췄으나, 아들들이 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정변이 발생하여 견훤은 금산사에 갇히고 맙니다.따라서 견훤은 후백제의 운명이 가망 없다고 판단하였는데, 거기다 본인이 후계로 여기지 않은 신검이 정변까지 일으키니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행동한 듯 보입니다.
Q. 조선의 숙종때 환국정치가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음... 환국은 신권의 강화를 보여주기 보다는 국왕권의 강화에 영향을 준 사건입니다. 오히려 붕당정치기 상호 균형인 상태에서 국왕이 개입하기 더 어려웠죠.숙종 시기 있었던 3차례의 환국을 보면 결국엔 숙종 자신과 매우 밀접합니다. 서인이 쫓겨난 기사환국은 숙종의 후사 문제와 관련한 것이었고, 갑술환국은 남인의 전횡을 보다못한 숙종이 내린 처분입니다.이렇듯 붕당 간의 극한 대립인 환국에 국왕이 직접 개입하였고, 국왕은 사안에 따라 특정 붕당의 손을 들어주어 정국을 뜻대로 좌우하였습니다. 즉, 붕당의 운명은 결국 국왕권과의 관계에 따라 갈린 겁니다.이후에도 숙종은 노론과 소론의 갈등에 개입하여 노론의 손을 들어주는 등, 사실상 환국은 국왕의 역할을 증대시켰을 뿐 아니라 정통성과 권력 강화에도 어느 정도 기여했다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