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우리 나라에 유도는 언제부터 시작된 무도인가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유도의 역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우리나라 유도의 역사는 기록상 고구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3세기 무렵 고구려 고분인 각저총(角觝塚)의 벽화가 그 기록의 하나인데, 거기에 그려져 있는 수박(手博)과 씨름 장면 등이 유도의 원형으로 추측된다. 물론 그 그림을 지금의 유도와 직접 연관짓기는 무리가 있지만, 당시만 해도 격투기가 아직 씨름·태권도·유도 등으로 분화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그런 연상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조선 시대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나오는 수박·권법의 그림에서도 유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유도와 관련된 이러한 역사적 흐름은 조선 후기를 거치면서 소멸되었다.그와 달리 우리나라로부터 무예를 전수받은 일본은 16세기경 유술(柔術)이라는 특유의 무예를 형성해 발전시켰다. 나아가 19세기 후반 가노 지고로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여러 가지 유술들을 종합 집대성해 오늘날의 유도로 정착시켰다. 아시아 최초로 IOC 위원을 역임했던 그는 유도를 세계적인 스포츠로 발전시켜 1951년 12월 IJF(국제유도연맹)를 결성했다. 1956년에는 제1회 세계유도선수권대회를 개최했고, 1964년 제18회 도쿄올림픽에 유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데도 크게 공헌했다. 우리나라의 현대 유도는 비록 그 근원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 무예라 해도 일본 유도가 이식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일제 강점기 기독교청년회(YMCA)를 중심으로 시작된 우리나라의 현대 유도는 광복 후 조선유도연맹이 결성되면서부터 활발히 보급되었다. 그 조직은 1950년 대한유도회로 재결성되었고, 1953년 후진 양성을 위해 대한유도학교를 설립하는 등 우리나라의 유도 발전을 앞장서 이끌어왔다.
Q. 나막신은 우리나라 고유의 신발이 맞나요?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나막신은 12세기 후반 네덜란드와 북유럽에서 시작된 중세 시대부터 착용해 왔습니다. 나막신은 경제성과 편안함으로 인해 빈곤층과 노동 계급을 위한 가장 일반적인 신발 스타일이었습니다. 신발은 나무, 가죽, 천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종종 화려한 페인트와 엠보싱으로 장식되었습니다.나막신은 일반적으로 농부, 공장 근로자 및 광부의 보호용 신발로 사용되었습니다. 나무 밑창은 이러한 작업에 사용되는 날카로운 도구와 재료로부터 보호해 주었습니다. 이 신발은 내수성으로 인해 어부, 부두 노동자, 철도 노동자들도 사용했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나막신이 실용적이고 편안한 신발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된 군대에서도 나막신을 채택했습니다.나막신의 주요 생산국은 네덜란드였지만 독일, 프랑스, 스칸디나비아, 영국 제도에서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나막신은 19세기에 미국에서도 채택되어 농촌 인구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습니다.
Q.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왕비인 민비와의 세력관계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구한말 패망의 시초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라는 말은 잘 못 되었습니다. 이미 조선이라는나라는 패망의 기운이 보였고 나라는 부패했습니다. 안동김씨, 풍양조씨에 의한 세대정치가 판을 쳤습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우리가성장했으려면 정조가 조금 더 오래 살 거나 후계자를 잘 양성 했어야 합니다. 정조가 김조순에게 자신의 아들을 부탁하면서 그를 너무 신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흥선대원군은 이 쓰러져 가는 조선을 나름의 방법으로 무너진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고 무너지 조세제도를 다시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말에는 나라에 바칠 세금이 10이면 지방관들은 50을 걷어 죽은사람에게도 군포를 걷고, 갓난 아이에게도 걷고 방납이라고 하여 내륙에 있는 사람에게 전복을 내게 하고 해안에 있는 사람에게 산삼을 바치게 하고 이러한 백성들을 괴롭히는짓이 일반화 된 것이 1800년대(정조의 사후) 입니다. 이러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그들에게 철퇴를 가한 것이 흥선대원군입니다. 물론세계사의 흐름속에 편승하지 못한 잘못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극 보수였던 흥선대원군의 생각은 외국과 교역하면 나라를 망치겠구나나라가 망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명성황후와는 사이가 매우 안좋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자주국방이었고 명성황후는외세와 교역해야 한다는 주의였습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반대를 위한 반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민씨 세력이 조정을 장악하자그들이 보였던 매관매직, 뇌물, 신식군대와 구식군대의 차별 등 썩었던 조선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고종이 어릴때는 흥선대원군 세력이강하였고 임오군란 이후에는 명성황후의 세력이 강하였습닏. 명성황후는 외세에 의존적이었습니다. 임오군란때도 청나라에게 힘을 빌렸고갑신정변때도, 동학농민운동때도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자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면결국은 더 큰 것을 내주어야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구한말의 패망의 시초는 흥선대원군이 아니며 망하려던 조선을 고쳐 보려 했던 것인흥선대원군이며 이미 조선은 전체적인 큰 틀에서 망해가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조선도 강력한 세력이 나타나서 급진적으로근대화를 했어야 했고 아니면 정조가 조금 더 오래 살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