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우리나라는 언제 이어도의 존재를 알았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어도는 1900년에 영국 소속 무역선인 소코트라 호가 이 암초에 좌초되면서 최초로 식별되었다. 이에 영문 명칭은 소코트라 호의 이름을 딴 '소코트라 락(Socotra Rock)'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어명 쑤옌자오(苏岩礁) 역시 '옌자오'는 한자 그대로 '바위(岩) 암초(暗礁)'라는 뜻이고, '쑤'는 Socotra의 첫 음절을 음역한 것이므로 영어명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1951년, 대한민국 해군과 한국 산악회가 '대한민국 영토 이어도'라고 새겨진 동판을 던지고 왔다고 하나, 신빙성이 낮다. 당시는 6.25 전쟁 당시였고, 심지어 제주도에선 아직 4.3 사건이 현재진행형이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지리를 보면 알겠지만 마라도와도 당시 뱃길로 10시간 이상 떨어진 거리이다. 한국 산악회 홈페이지를 보면 '전설의 파랑도 답사'라고 되어 있기는 하나, 정확히 현재의 이어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는 확인하기 힘들다. 1952년에는 이승만이 선포한 평화선이 북위 32도를 기점으로 그어지면서 포함되었다.
Q. 방약무인의 유래는 무엇인지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방약무인은 《사기(史記)》〈자객열전(刺客列傳)〉에서 유래한 고사성어로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자객의 한사람인 형가(荊軻)의 행동에서 비롯된 말이다. 위(衛)나라 사람인 형가(荊軻)는 문학과 무예에 능한 애주가였다. 연나라에서 사귄, 비파(琵琶)의 명수인 고점리(高漸離)와 만나 술을 마시다 취기가 돌면, 고점리는 비파를 켜고, 형가는 이에 맞추어 춤을 추며 고성방가하였다. 그러다가 떠도는 신세를 한탄하며 감정에 복받쳐 둘이 얼싸안고 울기도 웃기도 하였다. 이때 이 모습은 마치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이후 진(秦)나라의 정왕 정(政: 훗날 시황제)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연나라의 태자 단(丹)이 형가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진시황의 암살을 부탁하였다. 형가는 살신성인한 번어기 장수의 목과 연나라 지도를 가지고 진시황에게 접근하여 암살을 시도하였지만, 진시황의 관복만 뚫었을 뿐 암살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결국 죽임을 당했다.예문) 군대 생활이나 직장생활에서 지위를 악용하여 ‘방약무인(傍若無人)’하게 행동하는 상사가 있다면 그 조직은 활력을 잃고 불만만 쌓여가다가 결국은 큰 문제가 생기게 된다. 학교생활 역시 마찬가지다. 천방지축인 몇몇 아이들 때문에 수업 분위기가 엉망이 되고 교우관계가 나빠지게 된다. 특히 친구 사이에도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제멋대로 하려는 ‘싸가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결국엔 관계가 파탄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