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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한정현 전문가입니다.

한정현 전문가
부산예술고등학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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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무속신앙이 국가의 정식 계급으로 인식되었다가 조선에서 천시되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은 성리학을 정치 이념으로 내세운 지배 권력이 무속을 음사(淫祀)로 규정하고 여러 가지 제도와 장치를 통해 노골적으로 무속을 탄압하였습니다. 조선 세종 시대부터 불교 승려들의 도성 출입 금지가 시작되며 무당들도 도성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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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자카르타가 완전범죄라는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자카르타라는 이름은 '이루어진 승리' 정도의 뜻인 자바어의 산스크리트어 차용어인 '자야카르 (Jayakarta)'에서 유래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는 '자야(jaya)'와 '카르타(karta)'의 합성어입니다. 자야(jaya)는 자바어의 산스크리트어 차용어로 '승리'라는 뜻이며, 카르타('karta')는 자바에서 도시 이름으로 접미사처럼 종종 쓰이는 단어로, 자바어로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번영(하는)'이라는 뜻이거나, 산스크리트어로 '하다, 만들다' 동사 kṛ에 행위자형 접미사 -tṛ를 붙여 단수 주격 형태를 만든 것으로 '행위자, 성취자'라는 뜻입니다.그리고 범죄적 전문용어로는 완전범죄를 뜻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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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향일암은 암이라고 하고, 월정사는 사라고 하는데, 암과 사의 차이를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寺(사)’의 본래 발음은 ‘시’였다. 실크로드는 동서를 잇는 최초의 교역로였다. 실크로드엔 물건과 함께 경전도 실렸다. 후한(後漢) 시대에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서역의 스님들도 빈번하게 중원을 찾았다. 원래 ‘寺’는 외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임시 숙소였다. 그리고 역경승(譯經僧)이 사에 체류하는 주요 손님이었다. 최초의 중국 사찰이 세워지자 그 이름을 ‘백마사’라 정했다. 이후로 ‘사’는 관청을 뜻하기보다는 절을 가리키는 글자로 바뀌게 됐다. 발음이 변한 연원은 스님을 존대하는 ‘스승 사(師)’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지금도 관청을 뜻한 경우에는 시라고 발음한다.명산에 큰 절이 세워지고 사세를 넓혀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큰 절 주변으로 작은 절이 생기게 마련이다. 본찰인 사와 구별하기 위해 작은 절에는 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와 같이 규모가 큰 대찰에는 으레 10개 이상의 산내 암자가 존재한다. 곧 암자는 큰 절에 딸린 작은 절을 가리킨다. ‘庵(암)’의 본래 의미는 ‘마을과 일정하게 떨어진 곳에 나무와 풀을 엮어 만든 임시 움막’이다. 어쩌면 ‘庵’보다는 ‘菴’이란 글자가 본래 의미에 더욱 값한다. 자(子)는 주전자 액자 따위 낱말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접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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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사찰에 붙은 이름 중에 '-사'와 '-암'이 있는데 그 차이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절을 말할때 사(寺)라고 말합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일이지만 절에는 본사와 말사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기업의 지역본부와 대리점 정도의구분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암(庵)이라고 하는 것은 통상 일반적인 절에 부속된 별도의 거처이며 독립된 사찰은 아닙니다.그러나 그러한 암자에 있는 승려가 법력(?)이 높아찾아오는 신도가 많아지면 거의 별도의 사찰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며, 절로 승격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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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간은 언제부터, 왜 집단을 구성해서 살게 됐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류가 무리를 이루며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만년전 수렵채집사회에서 정착하여 농경사회를 시작하면서부터이며 인간이 무리를 이루며 사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첫째, 나 자신을 온전히 설명하려면 타인이 언제나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존재인 인간은 타인의 인식에 의해 설명되어 진다. 둘째, 무리에 속한다는 사회적 소속감은 정서적 안정성을 가져다주기에 중요하다. 정서적 안정성이 바탕이 될 때 인간은 보통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셋째, 생존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가장 원초적인 음식 획득, 짝짓기, 자녀 양육과 생활에 필요한 안락한 공간 확보, 경쟁의 최소화, 정보 공유 측면에서 독립적으로 단절되어 생활하는 것보다는 무리를 이루는 것이 유리하다. 인간의 무리 짓기 속성은 본능에 가까우며, 사회적 자극을 만족스럽게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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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대원군이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편 배경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세기 전반 근대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등 열강은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지를 구하기 위하여 종교, 상품, 군함, 대포등을 앞세우고 아시아 각국에 침입하였다. 1842년 영국은 아편전쟁으로 중국의 문호를 개방시킨데 이어,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베이징을 점령하여 굴욕적인 베이징조약을 맺었다. 이와 같은 사태는 조선을 경악시켜 서양의 침입을 경계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으며, 또한 가톨릭교의 유행과 서양 상품의 범람은, 정통적인 유교사회의 체제를 지키고 양화를 막으려는 움직임을 낳게 하였다. 더욱이 이양선의 잦은 출몰과 그들의 통상요구는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위기의식을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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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장보고가 해상을 장악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장보고의 휘하 병력이 원래 사병이라는건 학계의 통설이 아닌데, 무엇보다 이 병력을 사병이라고 적은 역사적 기록이 일절 없다는 것이 크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사서의 기록에 보면 장보고가 정식으로 신라왕(흥덕왕)을 찾아가서 병력을 받아냈다는 것 밖에 나와있지 않는데 그 병력이 사병이지 않냐는 것은 그냥 후대 사람들의 추측일 뿐이다.현재 학계의 입장은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이후 교역을 통해 재원을 충당하였고 그 영향으로 병사들이 점차 사병집단화 되었다는 점은 통설로써 받아들이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사병 조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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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서양식기 중 칼이나 수건이 결투장에서 유래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나이프는 원래 무기로 썼던 것인데 끝을 둥글게 하여 현재의 형태로 만들어 식사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깔끝을 바깥쪽으로 향하게 놓으면 상대방에게 적의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또 한가지, 서양에서는 나이프를 연필 쥐듯이 잡고 사용하면 상스러운 행동으로 여긴다.영국에서는 기사들이 결투를 신청할 때 손수건을 던졌다. 마찬가지로 냅킨을 던지는 것도 도전의 표시. 식사 중에 자리를 뜰 때 냅킨을 식탁에 놓는 것은 요리가 맛이 없어서 자리를 뜨겠다는 의사표시가 된다. 식사 도중에 자리를 뜰 때 냅킨은 의자에 놓는 것이 매너. 단, 식사가 완전히 끝난 후에는 테이블에 적당히 접어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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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여름이 없는 나라가 있나요? 더위가 너무 싫어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린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북극지방, 러시아, 알레스카, 캐나다 북극 지역 정도 입니다.하지만 이곳들도 기온이 높지는 않지만 여름이 잠시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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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통일신라와 발해는 교류가 없었나요?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시대와 달리 남북국시대에는 양국 간 큰 전쟁이 없었고 대신 양국은 신라도(新羅道)라는 교역로를 통해 교역을 자주 했다. 단, 빈공과 경쟁이나 의전 서열 관련 분쟁 등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라이벌 의식이나 얕은 적대감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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