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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휴리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휴리 전문가입니다.

이홍휴 전문가
롤링홀컬쳐원
Q.  그림에 가치를 매기는 기준은 구매자가 많으면되는가요?
안녕하세요. 이홍휴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가치를 매기는 것에는 여러가지 요소가 작용하게됩니다. 희소성, 역사적 가치 , 작가의 컨디션 ,트렌드 등등 여러가지가 작용하게됩니다.
Q.  민속극의 개념과 기원, 배경, 특징 및 유형 등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홍휴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국에는 가면극, 꼭두각시놀음, 무극, 발탈, 진도 다시래기, 우희, 만석중놀이, 영등희 등 다양한 민속극이 있었다. 이 민속극들은 대부분 사회 풍자의 희극으로서, 사회적 불평등 때문에 빚어지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제시했다. 민중은 민속극을 통해 일시적으로 기존 질서로부터 벗어나 해방을 구가했다. 일상 세계에서라면 마땅히 금기시되던 문제들을 놀이판에 드러내어 다룸으로써, 평소 억압되었던 갈등과 불만을 발산하고 해소하는 기회로 삼았다.민속극은 민족 문화를 말살하고자 한 일제강점기와 민족 분단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전승이 위축되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 가면극을 중심으로 한 민속극 전반이 새로운 조명을 받기에 이른다. 당시 정부는 근대화 또는 서양화 추진과 민족 주체성 확립이라는 과제를 추구하면서 유형문화재를 보존•복원하고 무형문화재를 지정하는 사업을 펼쳤다.한편, 대학생을 비롯한 비판적 지식인들은 전통 가면극의 가치를 재발견해 민주주의적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대학가에서 탈춤 부흥 운동이 크게 일어나 전국의 대학생들이 가면극을 배워 공연하는 일이 자주 있었고 그 열의도 대단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것도 시들해지고 말았다. 그 대신에 민속극에 기반을 둔 창작극인 마당극(마당굿) 또는 민족극이라 불리는 일단의 정치극이 새롭게 등장해 체제 비판을 시도했다. 1980년대 초두에 이르러 기존 문화 풍토에 하나의 문화적 충격으로 던져진 마당극은 민속극의 이념적 혁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처음에는 마당극 또는 마당굿이라 부르다가 점차 민족극이라는 용어로 통일되었고, 1988년 12월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가 결성되었다. 마당극은 민족 문제, 농촌 문제, 노동자 및 도시 빈민 문제, 사회 일반 및 시사 문제, 역사적 사실의 재해석 문제를 다루었다. 이는 당대 사회 운동의 흐름과 긴밀히 결합해 들어가는 민족극 운동의 작품 활동 경향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다른 한편으로는 전문적인 연극 단체 가운데서도 가면극•판소리•인형극 등 민속극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창작극을 정립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1973년에 연출가 허규를 중심으로 창단한 ‘극단 민예’와 손진책의 ‘극단 미추’이다. 극단 민예는 ••• 등을 공연했다. 은 가면극의 장단•춤사위•등퇴장 동작과 판소리의 아니리를 활용했다. 은 창극인데, 등퇴장과 몸동작에 가면극의 춤사위를 활용했다. 는 현대판 가면극이고, 는 민속놀이였다.이와 같이, 민속극은 새로운 한국적 현대 연극의 창출을 위한 창작 자원으로서의 의의도 지니고 있다. 현재 연극계에서는 민속극을 활용한 한국적 현대 연극을 창작하여 공연하는 연극 단체들이 여러 개 생겨났고, 이들 중 일부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국립창극단의 창극, 극단 목화(오태석)•연희단 거리패(이윤택)•민족예술단 우금치(류기형)•극단 민들레(송인현)의 연극, 극단 민예(손진책)의 마당놀이, 한국민족극운동협회 산하 단체들의 민족극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예술적 완성도를 위해 아직 갈 길이 먼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전통연희를 창작 자원으로 활용하여 좀 더 수준 높고 재미있는 한국적 현대 연극을 창출하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민속극 [民俗剧] (한국민속예술사전 : 민속극)
Q.  대한민국은 왜 건국초기에 친일세력을 제거하지 못했나요?
안녕하세요. 이홍휴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초기 광복이후 친일세력 을 제거하려는 노력은 있었으나.. 아무래도 우리나라를 통치하던 미군입장에서 편하게 통치하려면 기존 기득권을 쥐고있던 친일세력에게 다시 직책등을 맡기는것이 편하여 그렇다고 알고있습니다.
Q.  무궁화가 우리나라의 국화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홍휴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무궁화가 국화로 적합하지 못하다는 의견은 구한말에도 있었다. 나라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던 그 당시에도 《황성신문》은, 무궁화는 국화로서 마땅치 않으니 복숭아꽃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그후 일정 때에는 무궁화에 대한 시비가 있을 여지가 없었다.해방이 되면서 국화로서의 무궁화의 자격 문제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소설가 이태준(李泰俊)과 같은 이는 무궁화는 나라꽃으로 적당치 않으니 우리에게 친근감을 주는 진달래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6·25전쟁 이후 무궁화가 국화로 적합한가에 관한 시비가 다시 일어나 1956년에는 지상논쟁이 벌어졌다.식물학자 이민재(李敏載)는 조선일보(1956년 2월 8일자)에, 무궁화는 국화로서 적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궁화가 국화로 지정된 일도 없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일이 없는 꽃이라 하였다. 그는 국화의 후보로 진달래를 추천하면서 국화가 될 만한 전제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조목을 제시하였다.• 국토 전역에 분포하고 있을 것• 우리나라 원산종(原産種)으로 민족을 상징할 수 있는 꽃일 것• 민족과 더불어 역사적인 친교가 있을 것• 이름이 고울 것은 물론 또 그것대로의 아름다움을 지녀야 할 것 등·······이보다 조금 앞서 조동화(趙東華)는 한국일보(2월 3~4일자)를 통하여 무궁화 부적격론을 발표하였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첫째, 자생지가 전국적이지 않고 주로 중부 이남에 분포하고 있고둘째, 원산지가 인도임으로 외래식물이며셋째, 진딧물이 많이 붙고 단명허세(短命虛勢)하며넷째, 휴면기가 너무 길고 봄에 싹이 너무 늦게 돋는다.이 글이 그때의 모든 국민이 관심을 갖고 지켜 본 이른바 '국화 논쟁'의 시초이다.주요한(朱耀翰) 같은 이도 조선일보(2월 28~29일)에서, 대단히 좋은 꽃이지만 결점이 없는 것도 아니니 굳이 무궁화 대신 다른 꽃을 국화로 삼는다면 진달래보다 개나리를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진달래는 정열적인 대신에 번뇌상(煩惱相)이 있는데 개나리는 오직 명랑하고 쾌활한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에 줄줄이 종기종기 의좋게 피어나는 것이 우리에게 합심협동의 정신을 가르쳐 주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밖에 봉선화도 국화의 후보로 찬의를 표하고 싶은 꽃이라 하고 그 밖에 민요에서 친숙해진 도라지꽃과 버들꽃도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그러나 이와 같은 무궁화의 국화부적격론에 대해서는 강력한 반론이 일어났다. 이 반론은 당시 오랫동안 서울대 농대 화훼학 교실에서 무궁화를 연구해온 류달영(柳達永) 박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른바 무궁화의 국화적격론이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첫째, "자생지가 전국적이지 않고 주로 남쪽지방에 분포하고 있다"는 점이다.이 주장은 1950~1960년대의 식물학자들 사이에서 보고된 것으로 그뒤 연구를 거쳐 잘못된 것임이 밝혀진 바 있다. 함경도 등의 북쪽지방에 무궁화가 보이지 않는 것은 심어 가꾸지 않기 때문이며 무궁화는 우리나라 어느 지방에서도 잘 자라고 번식이 잘되는 강인한 식물이다.둘째, "원산지가 인도임으로 외래식물"이라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도 역사적 기록과 고증을 통해 볼 때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토양에 맞아 2천여 년 이상 오랜 옛날부터 이 땅에 자생해온 꽃으로 원산지와 다름이 없는 식물로 되어 버린 것이다. 또 최근에는 인도·중국·한국지방이 원산지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셋째, "진딧물이 많이 붙고 꽃이 단명허세하다"는 점이다.무궁화에는 진딧물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관리를 잘하면 없앨 수 있다. 또 최근에는 계속된 육종으로 진딧물이 없는 무궁화가 등장하였다고 한다. 또 단명허세하다는 것은 같은 현상을 놓고 나쁜 쪽만을 말한 것이다. 하루만에 깨끗이 지고는 또 새로운 꽃을 계속 피워가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무궁화를 무궁화답게 하는 우리 민족의 꽃으로서의 특징 중 하나라 할 것이다.넷째, "휴면기가 너무 길고 봄에 싹이 늦게 돋는다"는 것이다.무궁화의 꽃이 늦게 피는 것을 결점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꽃이 늦게 핀다는 것이 결코 문제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묵묵히 때를 기다렸다가 다른 꽃들이 대부분 지고 난 다음에 뜨거운 여름 햇살을 받으며 줄기차게 피어나는 모습이야말로 우리 민족성의 강인함을 잘 드러낸 것이라고 할 것이다. 무궁화는 계절적으로는 늦게 피지만 가장 부지런한 꽃이기도 하다. 새벽 5시 경에 피는 나팔꽃을 부지런하다고 하지만 무궁화는 이보다 더 일찍 꽃을 피운다.다섯째, 마지막으로 "무궁화의 꽃은 백합이나 장미처럼 아름답지 못하다"는 점이다.꽃에 대한 아름다움의 평가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르다. 지구 위에는 어떤 것이라도 모든 미를 갖춘 것은 없다. 일본사람들이 그렇게도 아름다움을 상찬하는 사꾸라에 대하여 우찌무라 간조오(內村鑑三)라는 교수는 러일전쟁(露日戰爭)이 끝난 후 일본이 기고만장하던 시기에 공공연하게 사꾸라를 보잘것없는 꽃이라고 호되게 깎아내리고 사꾸라를 비꼬는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 중국에서는 무궁화가 아름다운 꽃이라고 하여 이를 상찬하는 글이 수없이 전해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꽃이 고운 여섯 가지 종류를 모아 육연(六姸)이라 하였는데 작약·해당·이화(梨花)·부용·장춘(長春)과 함께 목근을 여기에 포함시키고 있다.그리고 국화는 아름다움이 반드시 그 전제조건이 될 수는 없다. 멕시코의 선인장, 그리스의 올리브, 캐나다의 단풍 등은 화려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 나라의 상징으로 그 국민이나 외국인이 인정하고 귀하게 여기고 있다. 스코트랜드 같은 나라에서는 애국주의적인 전설 하나 때문에 엉겅퀴 같은 독특한 꽃을 국화로 사랑하고 있다. 즉 중세기 덴마크 군대가 침략했을 때 스코트랜드의 엉겅퀴 숲에 매복하였다가 그 가지에 찔려 패퇴한 유래 하나만으로도 지역과 민족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네이버 지식백과] 무궁화의 국화(國花)로서의 적정성 시비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 3. 10., 이상희)
Q.  은혜를 뼛속 깊이 기억한다는 뜻의 각골난망의 유래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홍휴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진나라(晉--)의 대부(大夫) 위무(魏武)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첩(妾)이 한 명 있었다. 어느날 위무(魏武)가 병(病)으로 몸져눕게 되었다. 아직 제정신(-精神)일 때 그는 아들 위과(魏顆)에게 일러 말했다. 「내가 죽으면 이 첩(妾)을 다른 사람에게 개가(改嫁)를 시켜라.」 하더니, 그 뒤 병(病)이 심(甚)하여 죽게 되었는데, 「내가 죽으면 저 여인(女人)은 순장(殉葬)을 시켜라.」고 유언(遺言)을 했다. 이과(魏顆)는 「차라리 정신(精神)이 있을 때의 명령(命令)을 좇아서 이를 개가(改嫁)를 시키리라.」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서모(庶母)를 개가(改嫁)시켜 순사(殉死)를 면(免)하게 했다. 후(後)에 진나라(晉--)와 진나라(秦--) 사이에 전쟁(戰爭)이 일어나서 위과(魏顆)가 전쟁(戰爭)에 나갔다. 진나라(秦--)의 두회(杜回)와 싸우다가 위험(危險)한 지경(地境)에 이르렀을 때에 두회(杜回)가 풀에 걸려 넘어져 위과(魏顆)가 두회(杜回)를 사로잡아 뜻밖에도 큰 전공(戰功)을 세울 수가 있었다. 그날 밤, 위과(魏顆)의 꿈 속에 한 노인(老人)이 나타나서 말을 하는데, 그는 서모(庶母)의 아버지의 망혼(亡魂)이었다. 「나는 그대가 출가(出家)시켜 준 여인(女人)의 아비요. 그대는 아버님이 제정신(-精神)일 때의 유언(遺言)에 따라 내 딸을 출가(出家)시켜 주었소. 그때 이후(以後)로 나는 그대에게 보답(報答)할 길을 찾았는데 이제야 그 은혜(恩惠)를 갚은 것이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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