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양력과 음력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는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양력은 태양력이라고도 하며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일 년으로 삼아 만든 달력을 말하는데, 해를 기준으로 1년을 정하고 그렇게 1년은 365일이 되었습니다.태양을 도는 지구의 공전을 계산하여 만들면 1년의 길이는 정확히 365.2422입니다. 365일을 1년으로 지내면서 0.2422라는 시간의 오차가 작아 보이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차이는 굉장해지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4년의 주기마다 하루를 더해 366일이 되는 해를 만들었답니다. 4년에 한 번씩만 볼 수 있는 2월 29일! 그래서 365일의 해를 평년, 366일인 해를 윤년이라고 해요.음력은 태양을 기준으로 했던 양력과는 달리 달이 지구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한 달로 삼아 만든 달력을 말하고 1년이 354일이 되는데요. 역사적으로 태음력이 가장 일찍 알려졌다고 하는데, 당시 사람들이 달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정확하기 때문이었죠. 달의 모습은 매일 다르기 때문에 날짜의 변화를 확인할 때는 태양보다 확실한데요. 농업이나 어업활동이 활발한 우리나라에서는 달의 인력으로 발생하는 밀물, 썰물 현상이 더욱 많은 영향을 끼쳤어요.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권에서는 음력 달력을 이용하는 곳도 많다고 해요. 그렇지만 양력 음력 차이로 정확한 날짜가 나오지 않으니 함께 사용하는 것이죠앞서 말한 태양력은 농작물 재배와 수확 시기에 맞춰져 있는 삶에 큰 도움이 되지만 태양으로는 한 달을 잴 수 없어요. 이 문제를 해겷한 것은 바로 달인데 주기적으로 변하는 모양으로 보름달의 주기 29.5일을 알아냈어요.예부터 우리나라는 음력을 사용했지만, 고종이 대한제국을 손포한 한 해인 1896년부터 태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답니다.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했어요.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시대 최초의 연호를 건양이라 이름 붙였는데 양력을 채택했다는 의미입니다.
Q.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진 세력의 등장과 풍수지리설의 유행이자겸의 난 이후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문벌 귀족에 대한 비판이 터져나왔습니다. 특히 이자겸이 김부식과 함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면서 사대 관계(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를 섬김)를 맺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 문벌 귀족 때문에 승진할 수 없었던 신진 세력들은 왕에게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고 왕 또한 신진 세력과 손잡고 문벌 귀족을 없애고 싶어 했습니다.한편, 이자겸의 난 직후 풍수지리설이 유행하면서 "개경(개성)은 이미 지덕이 쇠하여 서경(평양)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궁궐이 불에 타고 나니 왠지 수도를 서경으로 옮겨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면서 세상은 더욱 어수선해졌습니다.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서경 출신의 신진 세력인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근거로 서경 천도 운동을 일으켰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인종 때문에 서경 천도 계획이 물거품이 되자 묘청은 나라 이름을 '대위국(큰 일을 하는 나라)', 연호를 '천개(하늘이 열림)'라 하고, 나라 안에 또 다른 나라를 만들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반란에 맞서 개경에서는 김부식을 총사령관으로 토벌군을 조직해 1년여 만에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진압에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개경의 귀족 세력에 반대하는 서경의 농민들이 합세해서 반란군을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서경 천도 운동은 지방의 신진 세력인 서경파 묘청과 중앙 귀족 출신인 개경파 김부식이 대립한 권력 다툼이었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금나라에 대한 고려인의 자주 의식을 보여 준 사건이자 서경 백성들의 행동을 통해 백성의 저항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채호는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조선 역사상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사건'이라고 높이 평가 했습니다.
Q. 송유진의 난은 무엇을 말하는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594년(선조 27) 송유진(宋儒眞, 1565∼1594) 등이 창의병(唱義兵)을 자처하며 충청도 천안(天安)ㆍ직산(稷山) 일대에서 세력을 모아 변란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고발되어 처형된 사건입니다. 1596년에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난’과 함께 임진왜란 기간에 일어난 대표적인 변란으로 꼽힙니다.《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송유진의 난은 1594년(선조 27) 음력 1월 11일 충청도 조도어사(調度御史) 강첨(姜籤)의 보고로 조정에 알려 졌습니다. 반란군이 청계산(靑溪山)에 숨어 있으며, 춘천(春川)·해주(海州)·전라도·충청도의 세력을 모아서 음력 1월 20일에 변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내용이 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충청 병사 변양준(邊良俊)과 순변사 이일(李鎰)에게 군대를 이끌고 그 지역을 순시하며 반란 세력을 색출하라는 명령을 내려졌습니다.다음날인 음력 1월 12일 주모자로 알려진 송유진(宋儒眞)·김천수(金天壽)·오원종(吳元宗)·유춘복(柳春福) 등 10명이 직산에 살던 홍응기(洪應沂)·홍난생(洪蘭生)·홍우(洪瑀)·신계축(申癸丑)·홍찬(洪璨)·김응추(金應秋)·홍각(洪殼) 등 7인에게 붙잡히면서 반란은 곧바로 진압 되었습니다. 홍각 등은 송유진과 공모해 병사를 모았으나, 충청병사 변양준에게 회유되어 자신의 집으로 송유진 등을 불러 붙잡아 관군에 넘긴 것 이었습니다.관군에 붙잡힌 송유진 등은 곧바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음력 1월 24일과 25일 이틀 동안 선조(宣祖)에게 직접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군대를 일으켜 도성을 포위한 뒤 광해군(光海君)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는 혐의가 씌어 졌습니다. 결국 주모자로 인정된 송유진·김천수·오원종·유춘복·김언상(金彦祥)·송만복(宋萬福)·이추(李秋)·김영(金永) 등은 음력 1월 25일 선조의 친국이 끝난 뒤 곧바로 능지처참을 당했습니다.한편, 조정은 송유진 등의 처형과 동시에 대사면을 단행해서 민심을 달래기 위한 조치도 함께 펼쳤습니다. 아울러 이산겸(李山謙)과 승려 도현(道玄) 등을 추가로 압송해서 반란 혐의를 조사했고, 그 결과 충청도 의병을 이끌던 지도자였던 이산겸은 심문을 받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송유진의 난은 선조와 조정에 대한 민심의 불만이 의병 활동과 같은 능동적 행위로 표출된 사건이었으며, 아울러 의병에 대한 왕과 조정의 적대감과 경계심이 드러난 사건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