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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영민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조영민 전문가입니다.

조영민 전문가
GA코리아
Q.  고려시절 전시과 제도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고려 토지제도는 다음의 순서로 변합니다.역분전 > 시정전시과 > 개정전시과 > 경정전시과> 전시과의 붕괴/녹과전 지급 > 농장 > 과전법​역분전은 고려 태조가 통일에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지급한 것으로 그 기준을 인성, 행동의 선악, 공로의 크기로 했습니다.(공신들에게 주는 포상의 개념)​광종 시기에 관리의 등급을 정하면서 토지제도도 이에 맞춰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경종 때 처음 전시과가 시행됩니다.(처음이라서 시정전시과) 시정전시과는 관리의 등급이 높고 낮음에 따라 받을 토지의 크기를 구분하였고, 여전히 인품이 지급의 기준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후 목종 시기에 전시과 제도가 수정되는데 이를 가리켜 개정전시과라고 합니다.개정전시과에선 드디어 인품 기준이 사라지고 오로지 관리의 직책과 등급으로 구분했습니다. 또한 군인들에게도 지급하도록 했습니다.​마지막 개정은 문종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다시 고쳤다고 하여 경정전시과라고 합니다. 그 특징은 현직에 있는 관료만 지급했다는 겁니다.이는 나눠줄 토지가 부족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한편 전시과에는 독특한 토지가 있었는데 바로 공음전입니다. 공음전은 5품(품은 등급) 이상의 높은 관리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대대로 물려줄 수 있었습니다. * 공음전 외에도 지방 향리들을 위한 외역전, 직업군인에게 준 군인전, 예비 관료를 위해 지급한 한인전 등이 있었습니다.​그러나 전시과 제도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반납해야 하는 땅을 불법으로 물려주거나 타인의 수조지를 침범하는 등 문제가 생겼습니다.결국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마구잡이로 땅을 빼앗아 전시과제도가 무너집니다. 특히 고려가 원의 간섭을 받은 뒤로는 권력자들이 문서를 위조하여 토지를 확장해 대규모의 땅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농장입니다. 농장이 많아질 수록 국가의 세금이 줄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는 무분별한 귀족과 사찰의 농장을 없애기 위해 경기 지역에서만 수조지를 나눠주도록 규정한 과전법을 시행하였습니다.
Q.  우리나라 간도를 찾아 올수 있나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간도협약만 놓고 보자면 우리 영토인 간도를 빼앗긴 것 처럼 보이지만 이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간도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백두산 정계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과연 간도가 우리 땅이 맞을까에 대한 의문이 들지요.조선은 건국 초부터 모든 군현에 관리를 파견했습니다. 울릉도와 제주도처럼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지역까지 목사와 군수를 파견했지요. 하지만, 간도지역에 관리를 파견한 것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1883년 서북경략사, 1885년 토문감계사이며 1903년 간도관리사로 이범윤을 파견한 것이 전부입니다.​즉, 그 이전까지는 조선의 영토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대동여지도를 포함해 조선시대 당시 그려진 여러 지도를 보면간도지역은 우리 영토로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통일이 되어도 거의 불가능합니다.
Q.  제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유래를 알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제사가 민중속에 자리잡은건 200여년에 불과 합니다. 소수 기득권층에서 행하던것을 민중들이 따라한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갑오경장 당시, 노비 천민 비중이 거의 90%가 넘었다고 합니다. 다른말로 조상의 산소를 받들고, 제사를 모실 수 있는 사람은 극 소수의 양반계층이었습니다.경술국치(한일합방) 후, 호적을 만들면서 성씨를 새로 부여받은 사람의 비중도 거의 그만큼 입니다. 어느 천민부락에 사는 사람들 불러서, 성씨가 뭐냐고 물으면 거의 성씨가 없었지요, 궁여지책으로 너희 주인댁 성씨는 뭐냐고 물어서 그 성씨로 호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어느 양반가문이 있으면 그 가문 일족은 물론, 그가문에 소속된, 노비 소작인 등등이 모두 그 성씨를 사용하게 된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런 사유로 우리나라 카스트제도가 사라졌지요. 종합적으로 판단할때, 집에 100년넘은 족보책부터 현재까지의 족보가 없다면 거의 그런경우라고 봐도 무방합니다.제사문화를 질문 하셨는데, 그것역시 비슷한 과정으로 변천되어 왔다고 봅니다. 성묘를 하고, 차례를 모시고 그런걸 기록한 오래된 문헌은 없습니다. 자생적 문화라고 봐야 합니다.
Q.  설날 세뱃돈의 문화를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세뱃돈 유래에 관한 정확한 결론은 나지 않고 있습니다. 한가지 확실한것은 세뱃돈을 주는 문화가 그리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19세기 조선의 풍습을 묘사한 동국세시기에도 설날에 돈을 준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반면 동아시아 지역의 여러나라에서는 세뱃돈과 비슷한 풍습이 있었습니다. 중국은 나이에 관계없이 빨간봉투에 돈을 담아 덕담을 해주는 문화가 있었고 몽골에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돈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선물을 줬습니다. 베트남과 일본에서는 세뱃돈과 같이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돈을 주고 했습니다. 많은 민속학자들의 추측에 의하면 일제시대 일본의 세뱃돈 문화가 상류계층 중심으로 퍼지다가 60년대에 완전히 정착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예전에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용돈을 받을 기회가 흔치 않았는데 이것을 세뱃돈이 대체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Q.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은 실존 인물인가요?
안녕하세요. 조영민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주인공 장발장은 작가 위고가 창작해낸 인물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사람을 모델로 삼았다 한다. 그 실존 인물은 유진 후랑수아 비도크라는 사람인데, 소설 주인공 장발장처럼 전과자였다가 큰 기업가로 성공, 자선활동을 많이 한 인물이었다. 비도크는 자기 공장의 한 노동자가 사고로 무거운 화물운반기계에 깔렸을 때 장발장처럼 자기 어깨로 그 기계를 들어올려 구출했다. 장발장이 배고픈 가족을 위해 빵을 훔치는 장면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작가 위고는 어느 날 파리 거리를 거닐다가 어떤 남자가 빵가게서 빵을 훔치다 경찰에 체포되는 것을 목격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한 귀족부인과 그 아들은 냉정하게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소설 주인공도 빵을 훔치도록 구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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