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첨성대와 비슷하게 생긴 구조물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첨성대와 완전히 같은 형태나 기능을 지닌 구조물은 드물지만, 비슷한 목적이나 형식을 가진 예는 일부 존재합니다.먼저, 기능적으로 유사한 천문 관측 시설은 여러 문명에서 존재해 왔습니다. 중국의 고관상대는 천문 기구를 설치해 천체를 관측한 대표적인 예로 꼽힙니다. 하지만 대부분 넓은 평면 구조나 탑 모양의 벽돌 건물로, 첨성대처럼 좁고 높이 올라가는 원통형 석조 건물은 아닙니다. 이슬람권에서도 천문학이 매우 발달했으며, 마라가 천문대나 울루그벡 천문대와 같은 대형 관측소가 존재했지만, 이 또한 평면 기반 구조물로 첨성대와는 외형이 다릅니다.이와 달리, 외형적으로 첨성대와 유사한 구조물로는 중남미의 마야 문명에서 발견되는 ‘엘 카라콜’ 천문대를 들 수 있습니다. 엘 카라콜은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유적지인 치첸이사에 위치한 건물로, 윗부분이 원형 탑 모양으로 되어 있어 첨성대와 외형이 가장 유사한 천문대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이 건물 역시 별의 움직임을 관측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첨성대와 기능적으로도 연결됩니다.또한, 스코틀랜드 북부에 있는 ‘브로흐’라는 고대 석조 건축물들도 첨성대와 닮은 외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기원전 1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방어용 탑이지만, 구조적으로는 원통형 돌탑이라는 점에서 첨성대를 연상케 합니다. 다만 기능은 전혀 다르며, 천문과는 관련이 없습니다.결론적으로, 첨성대는 기능과 구조 양면에서 모두 독창적인 건축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부 유사한 사례가 세계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지만, ‘석조 원형 탑 구조’에 ‘천문 관측 기능’을 결합한 형태는 첨성대가 유일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Q. 공사시 유물이 발굴되면은 유물발굴비나 공사지연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공사 중 유물이 발굴되면 해당 공사는 즉시 중단되고, 문화재청이나 지방자치단체에 보고하는 것이 법적으로 의무화되어 있습니다. 이후 관계 기관은 발굴 현장의 가치와 중요성에 따라 긴급 발굴조사 또는 정식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됩니다. 이러한 문화재 조사 절차는 공사의 지연을 초래하며, 이에 따른 비용 문제도 함께 발생하게 됩니다.유물 발굴에 따른 비용 부담은 공사를 시행하는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민간 사업자의 경우, 유물 발굴에 필요한 비용은 대부분 해당 사업자가 부담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사전에 지표조사나 시굴조사 없이 공사를 시작한 경우라면, 책임은 전적으로 사업자에게 있습니다. 이에 따라 발굴조사비, 문화재 전문기관의 용역비, 관련 행정 절차에 따른 비용 등이 추가로 발생하게 됩니다.반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시행하는 공공사업의 경우에는, 상황에 따라 일정 부분 국가 예산으로 지원되거나 조정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사전 조사에서 문화재 유존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물이 나오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일부 비용을 국가가 부담하거나 사업 연기를 고려하여 일정 조정을 해주는 사례도 존재합니다.공사 지연에 따른 손해는 일반적으로 국가에서 직접 보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공사지연으로 인한 금융비용, 인건비 상승, 일정 차질 등은 사업 주체가 감수해야 합니다. 민간 건설사의 경우 이런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공사 착공 전 사전 문화재 조사를 철저히 진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이와 같은 절차와 비용 부담 문제는 『문화재보호법』에 근거하여 운영되며, 특히 제35조와 제48조는 문화재 발굴 시 공사의 중단과 보고 의무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물이 발견되었을 경우, 법적 절차를 지키지 않고 무단으로 공사를 진행하거나 유물을 손상시키는 경우에는 형사처벌이나 벌금 등의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Q.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들은 어떤 삶을 살았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고구려가 668년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한 뒤, 고구려 유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흩어지고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삶은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먼저 당나라는 고구려 멸망 직후 다수의 고구려 유민들을 포로로 삼아 본토로 끌고 갔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강제로 노역에 동원되거나 당의 군대와 행정 조직에 편입되어 활용되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고구려의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은 당에 투항한 뒤 관직을 받았지만, 끝내 신뢰를 받지 못하고 외곽으로 밀려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합니다.다음으로 고구려 유민들 중 일부는 신라로 피난하거나 강제로 이주되었습니다. 신라는 이들을 받아들여 일정 지역에 정착시키고, 군사력이나 노동력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신라 사회에서 하층민으로 분류되거나 차별을 받는 경우가 많았으며, 고구려 출신이라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일부 유민들은 지방 세력으로 성장하거나, 북방 방어 등 신라의 국방 체계에 기여하기도 하였습니다.고구려 유민들의 삶 가운데 가장 자주적이고 적극적인 재건의 움직임은 바로 발해의 건국이었습니다. 698년, 고구려 유민 대조영은 말갈족과 함께 동북방에 발해를 세우며 고구려의 정통을 잇고자 하였습니다. 발해는 정치·문화적으로 고구려의 제도를 상당 부분 계승하였고, 수도 상경 용천부의 구조 역시 고구려와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에게 새로운 국가로서의 희망이 되었으며, 실제로 발해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이 외에도 일부 유민들은 요동이나 북방의 유목 민족들 사이에 섞여 살거나, 소규모로 자급자족하는 공동체를 이루며 생존을 이어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