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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신라가 자신을 배신하고 한강유역까지 차지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신라를 공격했지만 대패하였고 국왕마저 전사한, 백제가 큰 피해를 입은 전투가 관산성전투입니다.
433년(눌지왕 17)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대항하여 나제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는 551년(진흥왕 12) 공동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라는 한강상류지역을, 백제는 남·북한성을 포함하는 한강하류방면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나 553년(성왕 31) 진흥왕은 백제가 회복한 남·북한성 등지를 탈취하여 자국의 주현으로 삼아 신주라 칭하였습니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대가야와 연합,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죠. 이때 관산성의 군주 각간 우덕은 전세가 불리하자 신주(경기 광주)의 군주 김무력의 원조를 얻고, 삼년산군(충북 보은)의 비장인 고간·도도가 구천(옥천 부근)에서 백제군을 격퇴하니 성왕은 관산성에서 전사합니다.
이 싸움에서 백제는 좌평 4명과 군사 2만 9600여 명의 전사자를 냈고 120년간이나 계속된 나제동맹은 결국 깨집니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유는 인적·물적 자원의 획득과 함께 서해를 거쳐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문호를 확보하였지만, 백제는 전쟁에 패한 이후, 귀족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해지면서 동성왕 이후 강화되었던 왕권이 동요되고 국왕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