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연산군은 업적이 혹시 있을까요?
조선시대 왕 중에서 평가를 나쁘게 받는 왕 중에 연산군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연산군도 치세에 이건 좀 잘 했다고 할 수 있는 업적이 있었을까요? 역사시간에는 이런 것을 전혀 배우지 못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산군의 업적
1. 왕권강화를 위해 훈구와 사림의 대립을 이용하였고, 특히 사림의 언론 활동을 억제하였습니다.
2. 경연을 중단시키고, 언문청을 폐지, 신언패 착용을 지시하였습니다
3. 언론 활동 억제를 위해 홍문관, 예문관, 사간원을 폐지하였습니다.
4. 승려들이 도성 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습니다.
라는 답변을 구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등극 6개월 후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인재를 확충하기 위해 별시문과를 실시해 33인을 급제,
경전과 문장력만 보던 과거시험에 시를 더했으며 관례 등의 간소화,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잦자, 귀화한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케 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했으며, 문신의 사가독서를 다시 실시해 학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으며 시를 지어 시 문학에 기여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산군의 제 9대 성종과 폐비윤씨의 아들로 시와 서예 춤 등 예능에 능한 왕이었으나 어머니인 페비윤씨의 죽음에 얽힌 모함을 알고부터 돌변하여 모함했던 후궁들을 때려죽이고 폐비윤씨의 죽음을 찬성했던 윤필상 등 사림파의 선비들을 죽이는 무오사화 정변을 일으킵니다. 경연을 없애고 사간원을 폐지하는 등의 비정으로 중종반정에 의해 폐위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연산군 재위시절에 사창 상평창 진제창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했으며 사가독서를 부활하였고 경상우도지도 국조보감 동국명가집 등을 발간하고 역대제왕시문잡저 속국조보감 여지승람을 완성하는 등의 업적이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산군의 업적
- 치세 :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인재 확충을 위해 별시문과 실시하여 33인을 급제
- 외교 :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하게 하여 안정을 꾀함
- 문화 : 문신의 사가독서를 다시 실시하여 학문의 질을 높임, 연회나 강연에서 시를 지어 시 문학에 기여
- 편찬사업 : 국조보감을 새롭게 수정하여, 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만듦
폭군이 되기 전까진 왕의 업무를 수행하는 면모도 존재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산군은 사창.상평창.진제창을 설치 하면서 빈민의 어려움을 덜어주었고, 사가독서를 부활 하였으며 또한 경상우도지도, 국조보감, 동국명가집 등을 간행했고, 역대제왕시문잡저, 속국조보감, 여지승람을 완성하는 등 즉위 초에는 다수의 업적을 이룩 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산군은 매우 순조로운 조건에서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성종의 적장자로 태어나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고(성종 14년(1483) 2월 6일), 12년 동안 충분한 세자 수업을 거쳐 19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유일하지만 중요한 결함은 모후(母后)가 사사(賜死)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충격적이고 비통한 사건이 분명했지만, 암투와 치정이 난무하던 전근대의 궁중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연산군은 이처럼 전체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참담하게 실패했다. 그런 원인을 분석하는데 매우 중요한 주제는 삼사(三司)다. 잘 알듯이 삼사는 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ㆍ홍문관(弘文館)이다. 그 관서(官署- 관청과 그 부속기관)는 국왕과 국정에 대한 광범하고 강력한 간쟁과 감찰을 기본 임무로 갖고 있었다.
비판적 언론기관인 삼사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시기는 성종 때였다. 우선 국가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이 완성됨으로써(성종 16년, 1485) 삼사를 포함한 주요 관서들은 그 기능을 법률적으로 보장받았다.
이런 제도적 변화와 함께 세조대 이후 과도하게 팽창한 대신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국왕의 의도가 작용함으로써 삼사는 국정의 필수적인 관서로 확고히 자리잡은 것이었다.
이것은 대신과 삼사가 견제와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국왕이 최고의 결정권을 행사하는 수준 높은 유교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중요한 발전이었다. 그러나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왕권의 전제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구조라는 사실도 분명했다.
연산군은 부왕의 치세에 이뤄진 이런 체제를 대단히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강력하고 자유로운 왕권의 구축과 행사를 지상목표로 삼았다.
그는 이런 목표에 저해되는 모든 행동을 ‘윗사람을 능멸한다’는 의미의 ‘능상(凌上)’으로 규정했고, 그것을 척결하는데 치세 내내 전력을 기울였다. 그 대상은 처음에는 삼사였지만, 점차 신하 전체로 확대되었다. 그렇게 능상의 혐의가 번져가는 과정은 폭정의 격화와 동일한 의미였다.
출처 : 인물한국사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