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원찰의 역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조선 시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종교, 사상계의 중심은 불교였습니다. 이에 따라 왕실이나 유력계층은 본인의 소원 성취나 혹은 사망한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수많은 사찰을 건립하였는데, 이를 원찰이라 하는데 역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원찰은 사찰중에서 주로 왕실이나 유력 권력 계층 구성원들의 안녕과 명복을 비는 목적으로 세워졌던 불교건축물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왕들의 능과 가까운 지역이었던 곳에 주로 건립되었는데요. 주로 경기 일대와 지역 수도등에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찰의 건립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이는 태조의 계비인 강씨가 죽은 후 1405년에 정릉에 장사지를 내고 흥천사를 세워 원찰로 삼았던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원찰은 왕과 왕비의 진영을 봉안하고, 기일마다 불교식 재를 올려 명복을 비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기일에는 국왕이 직접 방문하여 시설을 화려하게 하고 중요시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귀족들의 원찰도 있었습니다. 선원사, 보달원, 청계사, 보광사 등이 대표적인 사찰로 건립되었습니다.
그러나 1776년에 정조가 즉위한 이후로는 원찰에서 생기는 폐단이 많아지면서 원당을 금지하는 법령이 제정되어 원찰의 건립이 사실상 금지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진영을 모신 건물 중심으로 할때 원당이라고 하고 대궐 안의 원당은 내불당 또는 내원당이라 합니다.
신라에는 불교 공인 전 소지왕 때 내불당이 있었으며 544년 완공된 대왕 흥륜사, 신궁을 지으려던 계획을 변경해 553년 완성한 황룡사, 635년 창건한 영묘사 등은 왕실 원찰이었습니다.
또, 감은사는 문무왕의 명복을 , 봉덕사는 무열왕의 명복을 , 봉은사는 진지왕, 동화사는 민애왕, 보림사는 헌안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었고 송화방은 김유신, 장의사는 장춘랑 및 파랑, 자추사는 이차돈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되었고, 감산사는 김지성 일족의 명복을, 김ㄹ효양이 세운 무장사는 그 작은 아버지의 복을, 법광사는 김균정의 복을 비는 원찰이었습니다.
신라시대 왕실의 사원관계 기구로 원당전이 있어 원찰에 관여했으며 중대 초기 성립, 내성에 속했다가 후 어룡성에 편입된 이 기구에는 대사 2인, 종사지 2인의 관원이 있었습니다.
고려시대에도 왕실 및 귀족들에 의해 계속 원찰이 건립되었고 왕실에서 왕과 왕비의 진영을 모신 진전을 사원에 세웠는데 진전사원은 왕실의 원찰이었습니다.
이들 진전사원에는 왕과 왕비의 진영을 봉안, 기일마다 불교식 재를 올려 명복을 빌었고 기일에 흔히 국왕이 행차하였으므로 시설을 화려하게 하고 중요시했습니다.
이 밖에 고려시대에 귀족들의 원찰이 있었는데 1245년 강화에 건립된 선원사, 벽란강변에 세워졌던 이지영의 원찰 보달원, 충렬왕 때 조인규가 과천에 세웠던 청계사, 고용봉이 전주에 중창했던 보광사가 있습니다.
원찰의 건립은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었고 태조는 계비 강씨가 죽자 1405년 정릉에 장사지내고 그 옆에 흥천사를 세워 원찰로 삼았으며 이를 시작으로 왕이나 왕비의 능 근처 대부분 원찰이 건립되었습니다.
1776년까지 원찰에서 생기는 폐단이 많아 원당을 일정 금할 것을 법전화하여 사실상 원찰의 건립은 금해졌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예로부터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곳에 절을 짓기가 어려웠던 사실을 전하는 전설일 뿐 정확한 문헌사료가 없어 창건의 유래를 확실히 알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馬岩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高宗 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神力의 신神과 제압의 뜻인 륵勒을 합쳐 신륵사神勒寺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용과 관련된 설화는 신륵사가 강가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옛 선인들이 이 절을 세우고 강을 돌본 것에서 이러한 설화가 생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는 한국의 자생풍수에 따른 비보裨補적인 의미 역시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 때에는 신륵사 내 동대東臺위에 서 있는 전탑 때문에 벽절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 학승學僧인 신미信眉의 제자였던 김수온金守溫은 "여주는 국토의 상류에 위치하여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樂土라 불리었는데 신륵사가 이 형승形勝의 복판에 있다."고 칭송하였다. 이렇듯 풍광이 뛰어난 곳에 위치한 신륵사는 남한강 상류인 여강驪江의 물이 감싸안은 나지막한 봉미산鳳尾山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고찰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찰들이 깊숙한 산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에 비해 신륵사는 푸른 물줄기와 드넓은 모랫벌, 그리고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신륵사는 창건 이래로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화상懶翁和尙과 같은 고승대덕이 지냈던 곳이며 더불어 그 경관이 뛰어난 사찰로 이름이 높다. 조선 후기 문인 김병익金炳翼은 <신륵사중수기神勒寺重修記>에서 신륵사의 명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절을 세우고 폐하는 것이 세상의 가르침이 될 수 없거니와 유학자儒學者로서도 이를 위하여 노력할 일은 아니지만, 절을 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고적이 명승지로 이름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신륵사라는 절은 고려시대의 나옹이 머물러 있었으며 항상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이고 또한 높은 탑과 오래된 비가 늘어진 것이 예스러워 목은牧隱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시로써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여주는 산수가 청수하고 그윽하며 또한 평원하고 조망이 좋으며, 이와 더불어 신륵사는 높고 서늘한 것이 겸하여 있으니 그 경치가 절승한 지경과 같다. 오직 이 두가지 이유로 온 나라에서 일컬어 온지가 이미 천년이나 되었으니 비록 내가 절을 세우지 못할망정 폐할 수 있겠는가.'
신륵사 중수기는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을 여주로 옮기면서 영릉의 원찰로 신륵사를 다시 중건하자는 내용이 담긴 글이다. 이와 같이 신륵사와 여주의 뛰어난 경관이 전국에 알려진지 천 년이나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주와 신륵사의 아름다움은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주의 아름다운 경치 여덟 가지를 들어 여주팔경驪州八景으로 일컬으며, 그 첫 번째가 바로 신륵사이니, 신륵사는 수승한 경관과 오랜 역사로 인하여 여주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온 곳임을 알 수 있다.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찰의 건립은 조선시대까지도 계승되었다. 태조는 계비(繼妃)인 강씨(康氏)가 죽자 1405년 정릉(貞陵)에 장사지내고 그 옆에 흥천사(興天寺)를 세워 원찰로 삼았다. 이를 시작으로 역대의 왕이나 왕비의 능 근처에 대부분 원찰이 건립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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