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남빵의 역사를 알고 싶어요
얼마 전에 경주를 갔는데 경주에 빵집이 정말 많더라고요 특히 경주에서 유명한 황남빵이라고 있던데 황남빵은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알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참신한오랑우탄43입니다.
황남빵의 역사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경주 황남빵의 개발자이자 창업주 고(故) 최영화(崔永和) 씨는 1917년생으로 조상 대대로 세거하였던 경주시 양남면의 경주 최씨 집안 출신이다. 빈농 집안에서 나고 자란 최영화 씨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초등학교를 마친 1934년 경주 시내의 기우라(木浦) 제과점에 사환으로 취직하였다. 그는 제과점에서 만드는 밤처럼 생긴 생과자(なまがし, 生菓子)에 관심을 두고 빵 굽는 방법을 익혔다. 4년간 제과제빵 기술을 익힌 최영화 씨는 마침내 독립하기로 마음을 먹고 1937년 노서동에 간판도 없는 빵집을 열었고, 1939년 부모님이 살고 계신 황남동 30번지로 이전하였다.
최영화 씨는 비록 일본의 제과 기술을 배웠지만, 답습에 머물지 않았다. 일본의 생과자는 겉에 문양이 없어 조선의 문양을 넣는 것에 착안했다. 그는 떡을 만들 때 문양을 찍는 떡살을 살펴보면서 여러 차례 시도하였다. 어느 날은 우산의 살대를 묶어주는 축을 잘라서 빵에 찍어보니 그럴듯했다. 처음에는 공장에 주물로 만든 틀을 주문하여 사용하였으나 나중에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연꽃 문양의 틀을 직접 깎아서 사용하였다. 그렇게 고안하여 만든 연화문(蓮華紋)과 유사한 무늬는 이후 황남빵을 상징하는 문양이 된다.
황남빵이라는 이름은 최영화 씨가 지은 것이 아니다. 간판도 없는 가게에서 만든 이름조차 없던 빵이 인기를 얻자 평소 빵을 즐겨 사 먹던 학생과 동네 주민들이 황남빵이라고 동네 이름을 붙여준 것이 그대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최영화 씨에게 시련은 금방 닥쳤다.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한다는 핑계로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강토는 이내 전쟁을 위한 병참기지가 되었고, 빵을 만들 재료 조달이 어려워졌다. 해방된 이후에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설탕을 좀처럼 구할 수 없었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사정은 더욱 악화하였다. 재료 조달은 고사하고 세상인심마저 전쟁으로 흉흉해지자 곧 장사를 접고 다른 일을 알아보기 시작했으나 딱 부러지는 묘수가 나오지 않았다.
1940년대 이후 10여 년을 허망하게 보낸 최영화 씨는 39세가 되던 1956년 무렵 마음을 다잡고 황남동 30번지 천마총 인근에 빵집을 다시 열었다. 그가 10여 년 전 개발하였던 황남빵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기 시작하자 날개 돋친 듯이 팔리면서 결국 경주의 명물로 등극하였다. 1973년에는 황남동 307-2번지로 이전하였고, 19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가 열릴 무렵에는 황오동 347-1번지에 본점을 개설하였다. 황남빵은 2014년 기준으로 본점 외에 경주 시내 3개의 직영점을 통해 연간 매출 90여억 원의 제빵기업으로 성장하였다.
경주 황남빵
경주 황남빵
경주 황남빵
경주 황남빵
수제(手製) 빵만을 고수하는 ‘최고집’ 3대(代)의 장인정신
황남빵은 최영화 씨가 육순을 넘기면서 본격적인 대물림 준비에 들어간다. 1979년 최영화 씨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차남 최상은(崔相恩) 씨를 불러들인다. 최상은 씨는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대한전선이라는 대기업에서 소위 잘 나가는 직장인이었다. 그러나 부친의 부름을 외면할 수 없었던 최상은 씨는 직장생활을 청산하고 경주로 내려와 빵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았다. 1985년에 황남빵은 ‘황남빵’과 ‘경주 황남빵’을 상표등록 하였고, 1987년에는 최상은 씨가 2대 대표로서 가업을 물려받았다. 1995년 최영화 씨가 작고한 이후에는 최상은 씨의 장남 최진환(崔珍煥) 씨가 가업에 참여하여 3대째 이어갈 대물림을 준비하고 있다.
‘황남빵’ 홈페이지에는 ‘황남빵 철학’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는 “대를 이어 보존하고 계승한다.”라는 것이다. 최영화 씨에 이어 최상은, 최진환 씨가 3대를 잇고 있으니 실현된 셈이다. 둘째는 “오직 손으로만 빚는다.”라는 것이다. 한때 황남빵도 가내수공업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 자동제빵기를 주문 제작하여 도입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빵이 빨리 나오기는커녕 품질에서조차 손으로 빚은 빵에 현격히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수제 빵을 철저하게 지켜 오고 있다. 셋째는 "경주 일대에서 재배하는 국내산 붉은 팥만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1970년대 대만과 일본산 팥을 사용하였던 경험에서 비롯된다. 수입품이 국내산만 못해서 그다음부터 국내산만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황남빵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만들어진다. 물에 씻어서 가마솥에 푹 삶은 팥을 체에 걸러낸 다음 팥앙금에 백설탕을 넣고 3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저어주면서 달인다. 밀가루 반죽은 물에 소다를 넣어 섞은 다음 달걀 5개, 밀가루 1.15kg, 설탕은 밀가루의 3분의 2 비율로 순서대로 넣어 반죽한다. 이 반죽 비율과 손저울을 사용한 계량은 최영화 씨가 자손들에게 당부한 불문율이다. 준비된 팥소를 반죽에 5:1의 비율로 넣어 손으로 빚은 다음 성형구로 일일이 빗살무늬 문양을 찍는다. 모양이 완성된 빵의 표면에 달걀물을 솔로 찍어서 골고루 발라준다. 최종적으로 빵을 구울 때는 번철에 생 황남빵 24개씩 올려 가스 불에 7분 정도 구워낸다.
최씨 3대가 손으로 빚은 황남빵은 타이틀이 많다. 우선 경주시 지정 전통음식 제65400-792호에 선정된 것을 시작으로 경상북도 명물 제2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에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의 공식 후원사로 지정되었으며, 2002년에는 “국가산업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철탑산업훈장까지 받으면서 ‘국민의 빵’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밝은펭귄185입니다.
황남빵의 역사는 1939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에는 "신영빵집"이라는 이름으로 창업되어 있었으며, 그 후 1950년대에 현재의 황남빵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1971년에는 현재 위치인 경주시 황남동에 이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