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보단 미켈란젤로를 좋아하는1인입니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그림의 화풍차이라던가 서로 특이점이 있나요!?
조각쪽은 미켈란젤로가 원체 유명한 작품이 많으니 어느정도 알지만 그림쪽은 아예 몰라서요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다빈치는 인간의 육체가 가진 한계와 현실생활의 희로애락을 사실적으로 표현해 르네상스다운 인본주의를 일깨우고자 했다면 미켈란젤로는 인간이 가진 극도의 아름다움을 표현함으로써 인본주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 두 화가는 작품뿐 아니라 작품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도 달랐지요 다빈치는 뛰어난 아이디어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지만 완성품이 별로 없지요. 두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면서 작품을 만들어 갔지요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남성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예술가
미켈란젤로와 다빈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오스카 와일드, 랭보, 차이코프스키, 그리고 베르사체와 앤디 워홀, 이들을 묶는 공통 요소는 무엇일까. 물론 이들은 영역은 달라도 모두가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 예술가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을 하나로 묶는 또 다른 단어는 바로 ‘동성애’다.
남성적 아름다움을 빚어낸 신의 손,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 보나로티는 1475년 3월 카프리스의 투스칸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마을의 촌장이었다. 젖먹이때 어머니를 잃은 그는 열 살때 재혼한 아버지를 따라 플로렌스로 갔다.
예술적 흥취가 가득한 그곳에서 소년은 예술학도들과 친하게 지냈고 한동안 도나첼로, 지오토, 마사씨오, 보티첼리같은 대가들의 작품을 베끼며 지냈다. 1488년 벽화가 기를란다요의 도제가 되면서 지금은 전설이 된 한 예술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화를 잘 내고 말수가 적으며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먹고 마시는 일을 자제하고 잠도 거의 안 자면서 검소한 생활을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라파엘로 등 동시대의 다른 예술가들은 화려한 생활을 즐겼으나 미켈란젤로는 멋있는 옷을 삼가고 조촐한 작업복과 장화를 즐겨 신었고 그런 차림으로 잠을 자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조각가로 여겼지만 조각뿐만 아니라 그림이든 건축이든 그가 손을 댄 모든 부분에서 걸출한 천재성을 드러냈다. 그가 쓴 3백여편의 소네트는 대부분 게르라르도 페리니와 페보 디 포기오와 같은 젊은이들에게 보내졌다.
57세가 된 1532년 카발리에리라는 젊고 멋진 귀족을 만난 미켈란젤로는 나머지 생을 그에게 몰두했다. 수많은 사랑의 소네트를 써보냈으며 카발리에리를 상징하는 목동 소년 게니메데를 독수리 모습의 제우스로 변신한 자신이 하늘로 낚아채는 그림을 그려서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들의 관계는 미켈란젤로가 흠모하는 연사의 역할을 하고 카발리에리는 사랑받는 젊은이의 역할을 하는 플라토닉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우정은 32년 동안 지속되었고 미켈란젤로는 카발리에리의 팔에 안겨 죽었다. 그가 죽고 난 뒤인 1623년 카발리에리에게 보낸 시들을 모아 출판할 때 사람들이 동성애를 담고 있는 그 소네트를 보고 당황할 것이라 여긴 미켈란젤로의 조카가 대명사들을 바꾸어서 출판했다.
미켈란젤로의 성애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가 엇갈린다. “그대가 마음이 경건할 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남자 배우자를 멀리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고 쓴 아레티노는 페리리나 카발리에리와의 관계를 남색적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비해 바사리같은 이는 미켈란젤로를 두고 “자신의 예술과 결혼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1544년 루이기 델 리치오가 애지중지한 15살의 조카 체치노가 죽었을 때 미켈란젤로가 쓴 50편의 시는 특히 흥미롭고도 주목할만하다. 그는 “그대에게 한 시간밖에 바치지 못했건만 … 나는 이제 그대를 영원히 죽음에게 넘겨주고 마는구나”라고 소년을 애도한다. 68살 때 체치노를 알게 된 미켈란젤로는 소년의 아저씨인 루이기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사롭지 않은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1542년에 보낸 다음의 편지는 체치노에 대한 동성애적 환상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방금 플로렌스로 서정적인 연가를 보냈네. 알맞게 고쳐쓴 거이네. 자네 맘에 든다면 나를 사로잡은 불꽃, 그 사람에게 전해주게나. 한가지 부탁이 더 있네. 어제 밤부터 나를 휩싸고 있는 혼란스러움을 자네가 풀어주었으면 하는 것이네. 자네와 내가 숭배하는 그가 내게 인사를 건네는 꿈을 꾸었는데 그는 웃으면서도 나를 위협하는 모습이었다네. 그가 웃고 있는 건지 겁을 주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네 그려. 자네가 그에게 알아봐 주었으면 하네. 우리가 내일 거기서 만날 때 자네가 그 의문을 풀어주었으면 하네.”
미켈란젤로는 말할 필요도 없이 역사상 가장 뛰어난 걸작을 남긴 예술가이다. 남자를 사랑한 남자로서의 그의 성적 취향은 그가 남긴 위대한 작품들의 중심적인 요소를 차지하고 있다. 남자의 아름다운 육체는 그를 매혹시켰다. 그가 그린 여성조차도 남자의 몸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는 남자의 육체미에 대한 영웅적인 개념화와 형상화를 통해서 게이의 상상력뿐 아니라 우리의 문화적 집단적 상상력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그는 남자의 육체를 찬미했다.
미켈란젤로가 빚어낸 ‘다비드’의 아름다움을 생각해 보라. 자신만만하면서도 은근하고, 포즈를 취한 듯 하면서도 자연스럽고, 어린 듯하면서도 남성적인 힘찬 근육을 가진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어떤 이들은 미켈란젤로가 동성애자였기에 그토록 아름다운 남성을 조각할 수 있었다고 서슴없이 주장하고 있다.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미소
“모나리자가 여성일 리가 없다. 자세히 모나리자를 쳐다보면 느낄 수 있다. 모나리자가 남성이라는 것을. 마치 트랜스젠더(성 전환자)의 감추지 못하는 면도자국처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남자일 것이라는 음모설은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나온 얘기다. 모나리자는 다빈치가 4년에 걸쳐 그린 그림이지만 결국 완성되지 못한 채로 남았다. 그는 이미 24살 때 17살의 소년 모델 제코포 살타렐리에게 ‘불경스러운 짓’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견책을 받은 바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 이탤리 쿠스카니 지방에 있는 빈치에서 태어났다. 플로렌스의 공증인과 시골 소녀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조부모의 손에서 자란 그는 14살 때 재능을 인정받아 화가 안드리아 델 베로치치오의 도제가 되었다.
1482년 밀란에 있는 루도비코 스포르자아 궁정으로 자리를 옮긴 레오나르도는 그 유명한 ‘비망록’을 썼고 ‘암굴의 성모’‘최후의 만찬’같은 불후의 명작들을 그렸다.
그는 카프로치라는 귀엽게 생긴 열살박이 소년을 데리고 살기도 했다. 늘 뭔가를 훔치는 그 소년을 그는 비망록에서 ‘작은 악마’라고 부르면서 노트에 꼼꼼히 적어놓은 그 도둑질을 너그럽게 보아 넘겼다. 다빈치는 20년 동안 그 소년을 모델로 해서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레오나르도는 비밀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노트들은 거울에 비춰봐야 바로 보이게끔 반대로 씌여졌다. 그런 그의 성격 때문에 조수였던 세자르 드 세이토, 볼트라피오, 안드리아 살라이노같이 아름다운 청년들, 그리고 입양해서 상속자로 삼았던 프란체스코 멜찌라는 젊은 귀족을 근사하게 차려입게 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는 것말고는 그의 사생활에 대해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레오나르도는 1519년 끌루에서 죽었다. 그 옆에는 프란체스코 멜찌가 있었다. 전형적인 만능천재 레오나르도는 대단한 창조성과 능력을 가진 예술가이자 다방면으로 박식한 사상가, 폭넓은 발명가이자 과학자였다. 그가 남긴 8천장이 넘는 노트에는 갖가지 과학적 연구물, 발명, 건축 디자인, 스케치 등이 실려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 대가가 오늘날 게이의 심리상태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유명한 논문 「다빈치와 그의 유년시절 기억」(1910)을 통해서였다. 프로이드는 동성애의 원인에 관한 이론을 처음으로 발표한 이 에세이에서 레오나르도가 노트에 기록해 놓았던 어린 시절의 한 기억에 대해서 언급한다.
“아주 어렸을 적 기억 중 하나가 떠오른다. 요람에 누워있는 내게 수리 한 마리가 내려앉아 꼬리로 내 임을 벌리고 여러번 입술을 때렸다.”
프로이드는 이 기억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펠라치오에 대한 나중의 환상이 기억과 자리를 바꾼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또 펠라치오는 “젖먹이 때 엄마 젖꼭지를 빨던 그 안락한 상황을 다른 형태로 반복하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프로이드는 모든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 ‘모나리자’의 알듯 말듯한 수수께끼같은 미소의 비밀이 놓여있다고 보았다. 강력하지만 의문의 여지 역시 많은 프로이드의 레오나르도 읽기가 수많은 게이들의 삶과 의식에 미친 영향력은 그것이 옳든 그러든 간에 과소평가 할 수는 없다. 프로이드의 분석 도구로써의 레오나르도는 수많은 게이와 레즈비언에게 아직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여간 레오나르도는 동성애와 재능이 결합되어 분출되었다고 보여지는 무한한 창조적 에너지와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리고 한 위대한 예술가의 인간적 면모나 삶과 그가 남긴 예술작품에 대한 가치판단은 궁극에는 이를 감상하는 각자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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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작품으로는 아담의 창조, 레다와 백조, 인생의 꿈, 시스틴 예배당 천장화, 톤도도니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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