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은 왜 망나니처럼 살았던 것인가요?
조선 역사에서 왕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린 대원군은 흥선대원군이 유일한데요.
그런데 흥선대원군은 망나니처럼 살면서 다른 사람들이 '상갓집 개'라 부를 정도로 무시를 받고 살았다고 하는데요.
어떤 이유에서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2세에 어머니를, 17세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낙박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21세가 된 1841년(헌종 7) 흥선정(興宣正)이 되었고, 1843년에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1846년 수릉천장도감(綬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有司堂上),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내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철종 때에는 안동 김씨가 세도를 잡고 왕실과 종친에 갖가지 통제와 위협을 가하였다. 이 때문에 호신책으로 천하장안(千河張安)이라 불리는 시정의 무뢰한 천희연(千喜然) · 하정일(河靖一) · 장순규(張淳奎) · 안필주(安弼周)와 어울려 파락호(破落戶)주1 생활을 하였다. 또,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아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시정인과 어울려 지낸 이러한 생활을 통해 서민생활을 체험했기 때문에 국민의 여망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난세의 뛰어난 정략가로 장차 국정을 요리할 식견을 소지하고 있어, 왕궁 내의 최고 어른으로 익종비(翼宗妃)였던 조대비(趙大妃)와 연줄을 맺고 있었다.
안동 김씨 가문에 원한을 품고 있던 조대비의 친조카 승후군(承侯君) 조성하(趙成夏)와 친교를 맺었다. 그리고 조대비와의 인척관계임를 내세워 조대비에게 접근해 장차 후계자 없이 승하할 철종의 왕위계승자로 둘째 아들 이명복(李命福: 고종의 아명)을 지명하기로 묵계를 맺었다.
1863년 12월 초 철종이 사망하자, 원로대신 정원용은 이하응의 아들 이명복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해 익종대왕의 대통을 계승하게 하자고 아뢰었다. 조대비는 12세인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조대비는 1866년 2월 철렴[撤簾: 수렴청정을 거둠]을 선언하고 고종이 친정을 수행하였다. 흥선군은 고종이 즉위하면서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임금의 아버지로서 국정의 전권을 쥐게 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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