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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도화지113
하얀도화지11323.12.06

고종이 헤이그특사를 보냈지만, 서양은 특별히 안도와줬었나요?

안녕하세요

1907년 고종이 제2차 한일협약의 부당함과

일본 제국의 침략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비밀리에 특사를 보냈는데요

이때 서양의 반응이 별로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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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의 노력에 비해 각국 정부들은 이미 을사조약을 승인한 상태여서 한국정부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인정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회의 참석과 발언권을 거부하였습니다.

    미국·프랑스·중국·독일 등 각국 대표들에게도 협조를 구했지만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것에 항의의 의미로 서명을 미루고 있던 고종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로부터 온 만국회의 초청장을 받고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3인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2차 만국회의에 비밀리에 특사로 파견합니다. 이들은 초청장을 지니고 있었으나 러시아와 네덜란드가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과정에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주러영사관인 이위종은 비공식루트를 찾던 중 세계기자협회단이 주최하는 회의에 참석하여 일제에 의해 강제로 맺어진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그로 인한 외교권 박탈을 문제 삼는 내용을 유창한 영어로 표현함으로써 많은 박수갈채를 받게 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비공식루트를 찾던 이준은 분연히 자신을 희생하여 망국의 서러움을 표출하였습니다. 그러나 강대국들은 오로지 자국의 식민지에만 관심이 있을 뿐 일본의 눈치를 보면서 대한제국에 대해서는 크게 논의하지 않은 채 회의를 끝내고 맙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국, 프랑스, 중국 , 독일 등 열강 대표단에게 회의 참석 협조를 요구하나 소용없었고, 영국인 윌리엄 토마스 스테드가 주석 기사에 특사들의 신임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황제로부터 받은 것이며 따라서 한국 대표들은 공식초청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고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 이에 다른 신문들도 한국 특사에 관해 보도하며 일본의 침략상을 폭로, 한국의 입장을 알렸습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을사늑약 체결 직후 고종은 1905년 11월 26일 고종은 헐버트(Hulbert, H.B)를 통해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긴급 전문을 미국 워싱턴으로 보냈지만, 미 국무성은 헐버트의 전달을 묵살합니다. 또한 고종은 전 주한미국공사 알렌의 귀국 은사금으로 1만 달러를 주며 미국정부가 열강과 공동으로 진상 조사를 벌이도록 교섭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미국정부의 입장이 일관되게 친일적이었기 때문에 이 모든 교섭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에 고종은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 특사단 파견을 통해 국제사회 여론에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했습니다. 원래 1906년 8월에 열릴 예정이었던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고종에게는 일본의 불법적인 국권침탈을 국제문제화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러시아의 도움으로 47개국 중 12번째로 초청장을 받았으나 러시아의 동아시아 전략이 바뀌면서 초청장은 무효가 되었지만 고종은 이준, 이상설, 이휘종을 파견합니다. 비록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회의장에 입장은 못했지만, 고종의 친서를 평화회의 제1분과위원장에게 전달하였으며, 호소문을 각국의 대표와 외신기자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참석, 발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각국의 반응은 영국, 미국은 냉랭하였고, 러시아도 처음에는 적극 협력하였지만 포츠머스 강화 조약으로 외면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각국의 언론은 특사단을 후원하고 동정하였으며, 영국 언론인 스테트는 수차례 특사에 관한 기사를 게재하고 언론인과 접촉 및 언설하게 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에는 대한제국과 같은 경우

    국력이 상당히 약하였고 일본과 같은 경우에는

    아시아를 주름잡는 강대국이었기에 서양세력입장에서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대한제국의 편을 들어줄 이유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