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가 경복궁 가까이 소재한 이유는?
조선시대에는 유교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펼쳐왔다. 특히 4대문 안에는 승려도 출입을 금지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광화문 경복궁과 가까운 장소이자 서울의 중심 에 조계종 본산인 조계사가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니면 일본점령기 신설된 것인지 신설관련 배경 및 이유 등도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각산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조선 태조 이성계 재위 4년 창건되었다고 하나 실질적 창건은 구한말 순종 융희4년입니다.
대한제국 시절, 한국불교에는 구심점이 될 종단이 없어 계속 들어오는 일본불교 세력에 밀렸고 이런 상황에 개탄하며 만해 한용운 등 민족적 불교인사들이 새 종단을 구성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에 1902년 흥인지문 밖 지금의 창신동 창신초등학교 자리에 원흥사를 창건, 1908년 각 도의 사찰 대표 65인이 원종 종무원을 설치합니다.
원종의 주 목표 중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우는 것도 있었고 조선왕조 내내 유교 성리학을 숭상하고 불교는 억제하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멀쩡한 절도 산자락으로 추방당하거나 방화로 사라지는 때에 한양도성 사대문안에 절이 생기는 건 조선시대에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1895년까지는 승려는 천민급 신분으로, 도성 출입마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운다는 것은 억압받던 한국 불교계에 있어 의미가 컸고 시대가 달라짐을 뜻했습니다.
이에 3개월동안 백미 1천석, 6천여 환을 모아 중부 박동에 있던 동녕위궁을 3천환에 사서 허물고 1910년 그 터에 각황사를 세웠습니다. 이 자리는 현 조계사의 바로 옆이며 이 각황사가 조계사의 전신입니다. 각황이라는 이름은 깨달음의 황제라는 뜻으로 부처의 별명이기도 하지만 승려 도성 입성 금지를 해제하고 도성 내 절 설립을 허가한 대한제국 황실에 감사한다는 뜻도 있었습니다.
원종의 창종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데 각황사를 설립하고 원종 종무원의 설립인가를 한성부윤에 신청하나 서류 처리 도중 대한제국이 멸망하게 됩니다.
원종 종무원의 대표 격이었던 이회광은 잘못된 결단을 내리는데 그는 일본불교의 힘을 빌어 원종을 인정받고자 합니다.
일본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를 원종 고문으로 추대하고 연합맹약이란 것을 맺어 연합하나 실상은 조동종 밑에 원종이 들어가는 꼴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전라도 백양사의 박한영, 화엄사의 진진응, 북쪽에서는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이회광의 경솔한 행위를 규탄했고 이들은 경상도와 전라도에 있는 각 사찰에 통문을 돌려 1911년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열어 임제종을 설립, 북의원종과 남의 임제종이 양립하는 형세가 됩니다.
조선총독부는 원종의 신청을 기각도 승인도 하지 않고 지켜보다 1911년 사찰령 등을 내려 한국불교를 조선총독부가 직접 관할하려는 정책을 추진, 더이상 일본불교를 앞세워 조선침략을 꾀할 필요가 없어지니 한국불교마저 총독부가 직접 통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총독부는 이듬해부터 해인사를 시작으로 30본사를 선정, 사법을 인가함으로써 조선총독부 직할체제인 30본말사제를 시행, 곧 임제종과 원종이란 명칭을 쓰지 못하게 했고 임제종은 저항 끝에 강제 해산됩니다. 이회광과 원종은 곧 조선불교선교양종각본산주지회의원으로 바꾸고 존속하려하나 조선총독부는 쓸모없어진 원종의 기관에 대해 아무런 지원도 승인도 해주지 않아 결국 1912년 원종은 사라지게 되며 원종의 친일적 주지승들은 삼십본산연합사무소로 들어가 종명이 조선불교선교양종이 된 한국불교 30본사 전체를 총괄합니다
강제해산당한 한용운 등 임제종 승려들은 임제종중앙포교당을 조선선종중앙포교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찰령에 의거한 30본산제도에 대응하는 한국불교계의 새로운 대표기관을 세우고자 조선불교회, 불교동맹회등을 조직하고자 하나 조선총독부가 방해해 실패,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불교에 대한 적극적인 발전과 포교를 지원해주겠다고 회유하니 과거 조선시대 600년동안 천민 취급을 받던 승려들이 이에 감격해 많은 수가 친일이 되었고 남은 사람들 역시 30본산제 체제의 안으로 들어갈수 밖에 없었으나 한용운 등 지각있는 승려들은 서서히 민족적인 사상을 가다듬으며 3.1운동, 만단 등을 주도하며 저항을 계속합니다.
1930년 무렵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세운 사찰 박문사를 건축하고 모든 불교의 총본산으로 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한국불교 중 뜻있는 인사들은 이를 저지하려했고 1935년 한용운과 해인사 주지 회광, 마곡사 주지 만곡 등이 주축이 되어 31본산주지회의를 열고 총본산 설립과 조선불교선교양종종무원이라는 대표기관의 구성, 각황사 교당 개축을 결의합니다.
1937년 커다란 보천교 십일전 건물을 매입, 각황사 옆자리에 새로 절을 건축하고 1938년 완성하자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해 태고사 라고 개칭, 한국 조계종의 창시자였던 태고 보우국사를 모시고 태고사를 이어받겠다는 의지이자 한국 조계종의 본산에 어울리는 이름을 칭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각황사는 1938년 현재의 조계사가 완공된 후 건축비용 마련 차원에서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을 이전, 이후 일본식 본당 등이 철거되었으며 1941년 조선의 사찰 및 승려를 통할하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이 인가를 얻어 조선불교 조계종이 발족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말씀대로 조계사가 경복궁가까이 있는게 불교억제와 좀 상반되는 게 있습니다. 근데 조계사는 고려시대에 지어진 걸로 알려져 있고, 조선시대에서도 4대문에 안에 있으면서 보호를 받았습니다. 왕이 기도도 하고 했습니다. 왜냐면 왕실도 공식적으로는 불교를 멀리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믿고 숭배했습니다.
그래서 조계사는 조금 특별한 절이라 할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각산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조선 태조 이성계 재위 4년(1395)에 창건되었다고 말하나, 실질적 창건은 구한말 순종 융희 4년(1910)에 되었다. 현 조계사는 그 역사가 비교적 짧으나 얽힌 사정은 매우 복잡하다.
조선시대는 절대로 할 수 없었다고 판단되고 시대가 변한 시기에 창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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