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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로맨틱한발발이14223.11.20

인조와 소현세자는 어떤 관계였나요?

조선시대 부자지간인 인조와 소현세자는 사이가 어땠었나요?

인조는 소현세자를 어떤 아들이라고 생각했나요?

인조가 소현세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고, 어떻게 대우했는지 알려주세요.

또, 소현세자가 인조의 정치나 국정운영에 어떤 기여를 했으며,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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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현세자는 정묘호란(1627)이 일어나자 분조를 구성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민심을 수습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자호란(1636)의 패배로 청의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의 차기 계승권자로서 청의 세력 확장 과정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으며, 1644년 청의 북경 입성을 함께하였습니다. 당시 북경에서 아담샬과 교류로 서학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었습니다. 소현세자는 청과 조선의 관계를 중간에서 해결하고, 조선과 피로인들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또한 심양관소에서는 꾸준히 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였으며, 그 중 일부는 <심양장계(瀋陽狀啓)>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청에 잡혀간 피로인들을 속환하는 데 양국의 입장을 조율하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소현세자는 조청관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조선을 위해 노력한 바가 컸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현 세자가 청으로 끌려 갈 때 까지만 해도 소현 세자는 인조에게 충직하고 효심이 지극한 아들 이였지만 점차 경쟁자로 보기 시작하는 계기가 바로 청조정에서는 인조를 폐위하고 소현세자를 국왕으로 세워야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면서 입니다. 권력 앞에서 부자 지간이 결국 사이가 멀어 지게 되었고 인조는 소현 세자를 독살 해서 죽였다는 이야기도 듣게 됩니다. 소현 세자는 청에서 직접 장사도 배우고 새로운 문명도 많이 접해서 조선을 이끌고자 했으나 결국 8년 마에 조선으로 돌아와 얼마 안되 죽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