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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는 정묘호란(1627)이 일어나자 분조를 구성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민심을 수습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자호란(1636)의 패배로 청의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의 차기 계승권자로서 청의 세력 확장 과정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으며, 1644년 청의 북경 입성을 함께하였습니다. 당시 북경에서 아담샬과 교류로 서학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었습니다. 소현세자는 청과 조선의 관계를 중간에서 해결하고, 조선과 피로인들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또한 심양관소에서는 꾸준히 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였으며, 그 중 일부는 <심양장계(瀋陽狀啓)>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청에 잡혀간 피로인들을 속환하는 데 양국의 입장을 조율하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소현세자는 조청관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조선을 위해 노력한 바가 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