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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4.26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구한말 개항기에 서양 외세가쳐들어오고 있는 시점 굳이 흥선대원군은 쇄국 정책만을 고집하여 국제정세를 따라가지 못했는데요 흥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추진한 근거와 이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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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6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원군이 본격적으로 쇄국정책을 펴기 전 먼저 눈여겨 본 것은 청나라였습니다. 당시 청은 1860년 아편전쟁에 패함으로써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서구 열강에게 상당한 이익을 양도해 준 상태였습니다.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많은 기득권을 얻게 된 서구 열강은 서서히 조선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는데 그 선두에 선 것은 프랑스의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한·불·영 3국 동맹을 체결하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다고 건의하며 포교의 자유로움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남하는 생각보다 더디게 진행되었고 이를 우려했던 프랑스 선교집단은 불신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조선 내의 보수적인 지배세력들이 평등사상을 펼치던 천주교를 압박하기 시작하여 결국 1866년 카톨릭교 탄압의 포고령이 발표됨과 함께 프랑스 선교사 9명과 국내 신도 8,000여명이 처형되는 병인박해가 단행되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프랑스가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강화도에서 조선의 군대와 맞닥뜨리게 되어 병인양요로 번져갑니다. 프랑스 함대를 무력으로 물리친 대원군은 이에 고취되어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양이(鎖國攘夷)를 내세우며 쇄국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갑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흥선대원군과 쇄국정책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 12. 15., 한림학사)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세기 유럽의 산업혁명 이후 서양의 이양선이 조선 연해에 자주 출몰했고 이들이 통상을 요구하면서 해금정책에 따라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나 조난된 선원 등에게 먼 곳에서 온 사람들에게 최대한 관용을 베푼다는 유원지의 원칙으로 처리합니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공격으로 베이징이 함락되고 청나라 함풍제가 피난 간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선의 조야에 위기감이 확산되었고 영국, 프랑스와 청나라의 강화를 중재한 러시아가 그 대가로 연해주를 획득하면서 조선은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됩니다.

    이 무렵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위협을 막고자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려 하나 성사되지 않고 러시아의 국경 침범과 통상 요청이 기우였다는 것이 드러나고 마침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탄압했다는 소식이 들리며 천주교를 금지해야 한다는 대신들과 유생들의 주장이 이어지자 대원군은 천주교와 자신의 무관함을 과시하고 하듯 천주교를 탄압합니다.

    대원군은 병인박해를 계기로 발생한 병인양요를 물리치고 그 후 바다의 관문을 굳게 지킬 것이며 외국배는 삼가 통과할수 없다는 비석을 세웁니다.

    1868년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은 서양인에 대한 반감을 더 부추기고 1871년에는 1866년 발생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전쟁을 했습니다.

    신미양요 이후 대원군은 서양의 배에서 나는 연기와 먼지가 온 천하를 뒤덮어도 동방국의 광채는 의연하게 영원토록 빛나누나 라는 시를 짓고 양이가 침범하는데 싸우지않으면 즉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 라는 척화비를 세우며 서양 배척을 더 강화합니다.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 오페르토 도굴사건, 신미양요 등을 격으면서

    서양세력들이 단순히 무역만을 하려는 세력이 아니구나 우리의 것, 우리의 영토를 궁극에는 빼앗을 심산으로 접근해

    오는구나라는 제국주의의 검은 속내를 간파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조선을 방어하면서도 근대식 문물은

    받아 들였어야 하고 개화는 필요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조선을 지키기 위한 명분이었다고 해도 세계화의 흐름에 뒤쳐져서 우물안

    개구리식의 개혁만을 하여 조선의 골든타임을 놓치게 됩니다. 흥선대원군도 나중에는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였을 테지만 그가 집권한

    10년여의 세월은 정말 조선에게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흥선대원군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중심을 잡고 제국주의 세력을 견제하면서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었으면 지금처럼 분단된 아픈역사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근래에는 대원군 정권의 위정척사 정책을 근대적 성장을 위한 부국강병과 독립의 달성을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유학자들이 밀려오는 서양 세력을 막고 우리 것을 지키려는 투쟁을 전개한 사회적 운동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 대원군은 집권하는 동안 조선을 찾아오는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수교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변화를 싫어하고 현실을 외면했던 꽉 막힌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그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 결과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습니다.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원인



    사실, 흥선 대원군은 청을 통해 전해진 서양의 과학 기술, 그중에서도 특히 무기 관련 기술에는 관심이 많았다. 또한 흥선 대원군의 부인은 천주교 신자였다.


    서양에서 들어오는 물건들은 신기하고 인상적이었지만 백성들의 삶을 생각해서 경계심을 늦추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관대하게 대했던 천주교도 조선의 전통문화와 충돌하는 면을 보이자 흥선대원군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때마침 청이 서양 세력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면서 흥선 대원군은 서양 세력이 두려워지기 시작했고 아직은 문호 개방을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을 굳히게 된다. 문호 개방이란 자기 나라의 영토를 열어 외국 사람에게 무역, 여행 등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을 말한다.


    흥선 대원군은 문호를 개방하기 전에 군사력을 키워 국방의 강화에 힘쓰고 무기를 신식으로 개량하며 서양의 침입을 막을 준비를 했다. 한편 유교를 공부하는 선비들로부터 천주교를 탄압하자는 상소문이 끝없이 올라왔다. 결국 흥선 대원군은 조선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를 모두 내쫓는다. 그것도 모자라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조선의 천주교도 수천여 명을 모두 죽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프랑스는 조선에 책임을 묻는다는 핑계로 조선을 침략하고 수교할 것을 강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