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도 "유구국"이라고 기록된 류큐 왕국의 역사가 궁금합니다.
명나라 시대에 조선처럼 수교도 맺고 조공도 받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 본토와 언어도 달랐을테고요. 나름 문명도 발전했을텐데, 개략적으로 류큐 왕조 흥망성쇠가 궁금합니다. 현재 오키나와 지역으로 태평양 방어기지로 중요한 자리이기도 하고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류큐국은 1429년 제2대 쇼하시왕의 삼산통일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4세기부터 오키나와 일대에는 왕권이 약해지고 각지에 왕을 자처하는 안지들이 생기면서 츄잔, 호쿠잔, 난잔의 산잔 시대가 시작되는데 세 나라는 츄잔의 쇼하시왕에 의해 통일되어 류쿠국이 세워집니다.
쇼하시왕은 산잔 통일을 통해 류큐국을 만들지만 지방의 안지는 여전히 강했고 중앙집권적 왕이 등장하지는 못했습니다. 쇼하시의 죽음 이후 왕권은 미약하고 내란이 끊이지 않는 등 류큐국은 불안한 치세를 이어갑니다.
쇼토쿠왕이 급사하면서 쇼타이큐왕의 중신이었던 카나마루가 왕위를 선양받고 그는 쇼엔왕을 자처하여 제2쇼씨왕통을 엽니다.
제2쇼씨왕통때 류큐는 일본, 조선, 중국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왕조들과도 무역을 하는 등 전성기를 보내지만 16세기 후반 명나라가 활발히 무역을 재개하고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세력이 커지면서 류큐의 세력이 급격히 쇠퇴합니다.
1609년 일본 전국시대가 끝나고 지역정권인 사쓰마번이 류큐를 침공해왔고 당시 류큐의 수도 슈리성의 정문에는 적이 접근해오면 좌우양면에서 화살을 발사할 수 있도록 곡선으로 성벽을 만들었으나 큰 저항을 하지 못하고 패배, 아마미 군도를 빼앗기고 일본의 조공국이 되지만 이후 류큐는 다시 청과 일본에 이중조공을 하면서 다시 중계무역으로 번성을 되찾게 됩니다.
류큐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침략의 위협에 시달리는데 류큐국은 중국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일본은 우리의 어머니이다 라는 식으로 외교노선을 설정, 중국과 일본 양쪽에 모두 조공을 바치면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18세기 말 부터 경제가 악화되어 혼란스러워졌으며 19세기 중엽 서양 세력이 청과 일본에 개항희 압력을 가하면서 류큐는 중계 무역의 거점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됩니다.
일본은 1879년 3월 27일 경찰과 군인 등 약 600명을 동원해 무력적 위압 상태에서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한다는 식의 폐번치현 명령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8일 후인 4월 4일 일본 영토로 편입시켜 오키나와현을 설치합니다.
류큐국의 쇼타이왕은 일본 메이지정부에 의해 강제로 도쿄에 이주당해 후작에 봉해지게 되며 이 사건으로 청나라와 일본제국의 갈등은 심화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초기 중국·일본·여진 다음으로 많은 교류를 가진 나라가 琉球였다. 유구는 19세기말 일본에게 멸망하여 지금은 없어졌지만 14∼15세기까지는 중국의 책봉체제에 편입하면서 국제무대에 등장하였고, 또 활발한 해외활동으로 남방무역을 주도하였던 나라였다.
-출처: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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