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의 역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부여는 고조선과 더불어 우리나라 민족이 세운 고대 국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근데 부여에 대해 잘아는게 없는데 부여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알여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부여는 고리국의 동명왕이 건국한 예맥족 국가로 영토는 지금의 창춘시 이퉁강 유역을 중심으로 솽양과 남쪽으로 랴오닝성, 북쪽으로 헤이룽강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입닌다. 494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부여는 멸망하게 됩니다.
기원전 4세기부터 여러 한민족 예맥 계열의 나라가 세워지고 동명왕이 세운 부여,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와 해부루가 세운 동부여,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와 그 영향을 받은 백제가 한민족 예맥 계열의 나라입니다.
이들은 일찍부터 정착해 농경생활을 했고 은력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궁궐, 성책 , 창고, 감옥 등 진보된 제도와 조직을 가졌으며 신분계급은 왕과 그 밑에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 4가 등의 지배층, 그 및에 하호라고 불리던 읍인으로 구성된 계급의 둘로 나뉘는데 4가는 부여전국을 4등분한 사출도를 각기 맡아 다스렸는데 국도만은 왕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즉 4가는 국왕의 통솔을 받았으나 사출도에서 각기 소속의 호족과 하호들을 영솔해 마치 영주와 영읍의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 적의 침구가 있을 시 4가가 친히 출전하고 하호는 모두 군량을 부담했는데 국민개병제가 실시된 듯 집집이 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원후 49년 부여는 중원에 있는 국가에 사신을 보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혼인 동맹을 맺기도 합니다.
부여는 국력이 강해 선대부터 한번도 패하지 않았고 한나라 이래로 동쪽의 읍루를 신하로서 복속시키고 있었고 위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려 할 때 고구려의 침략을 받던 부여는 군량을 제공했고 부여가 선비족의 침입으로 위태로울 때 진나라는 선비족을 공격하나 진나라의 세력이 북만 민족에게 쫓겨져 남쪽으로 천도하면서 부여는 고구려의 침략을 더욱 받게 됩니다. 서쪽에는 선비족 남쪽에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았으며 고구려는 부여를 보호국으로 삼고 부려를 지나 북중국을 수시로 공격했고, 많은 북중국인들은 고구려에 끌려가 노예까 됩니다.
285년 고구려 서천왕 16년 서닙족 모용외에게 공격을 받아 북옥저로 도망했다가 후에 다시 본국을 회복하기는 하나, 346년 연왕 모용황에게 공격을 받아 쇠약해지며, 이후 고구려의 보호를 받다가 494년 고구려에 병합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부여는 기원전 4세깅 성립 된 고대 국가 입니다.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과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 추모의 설화가 굉장히 흡사하다고 합니다.이에 반해 백제의 건국 설화는 부여 및 고구려의 건국 설화와 비교했을 때 매우 다른데 특히 백제의 건국 설화는 난생 설화가 아닌데, 부여,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 및 가야도 난생설화인 걸 감안하면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시대에 해당하는 한반도 국가들 중에서 건국 설화가 난생설화가 아닌 나라는 고조선과 백제 둘뿐이라고 합니다. 동한대의 《논형》에 처음 부여 <동명왕 신화>가 언급된 것으로 볼 때, <동명왕 신화>가 원형인데 다른 여러문서들에서도 논했지만 동명왕이 시조이지만 소수림왕 대에 <주몽 신화>를 만들고 초기 역사를 정비하면서 <동명왕 신화>를 배껴 <주몽 신화>를 만들었으며, 이를 감추기 위해 동명왕을 천제의 아들로 설정한 해모수로 바꾸거나 교체했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합니다. 굳이 이렇게 한 이유는 그것 이외에도 천제의 혈통이란 설정을 부여해 주몽의 고귀함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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